고삐풀린 기업형슈퍼, 동네상권 접수중
고삐풀린 기업형슈퍼, 동네상권 접수중
  • 김성배 기자
  • 승인 2010.05.12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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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나들가게’ 실효 논란…중소상인들 거센 반발

기업형 슈퍼마켓(SSM) 법안이 표류하면서 중소상인들의 정치권에 대한 불만 표출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는 지난 달 23일 국회 지식경제위원회에서 통과됐던 유통산업발전법과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법이 6일 뒤 법사위 심의 과정에서 제동이 걸린 데에서 초래됐다. 

실제로 지난 7일, 중소상인살리기 전국네트워크는 여의도 한나라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5월 임시국회에서 SSM 관련법이 통과하지 못하면 유권자연맹을 결성해 이번 지자체 선거에서 SSM 법안 통과에 반대했던 한나라당 후보에 대해 낙선운동을 전개할 뜻을 내비쳤다.

▲ 기업형 슈퍼(SSM) 규제법안 표류로 중소상인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실속있는 정부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김성배

중소상인살리기 네트워크 측에 따르면, 4월 말에 법사위를 통과할 예정이었던 SSM 법안은 사업조정제도에 SSM 가맹점을 명시화하고 전통시장 인근지역에 국한해 SSM을 규제하는 내용으로 중소상인 측이 주장했던 ‘허가제’보다 훨씬 후퇴한 ‘등록제’였다는 것. 중소상인들은 반쪽짜리 법안조차 통과가 무산되자 허탈함을 금치 못하고 있다.

SSM 규제법안 제동에 중소상인들 반발

쉬운 예를 들어보자.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동네마다 다양한 빵집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수십 년 전통을 지켜왔다는 빵집부터 학원이나 대학에서 제빵 기술을 배워 창업한 젊은 빵집들 덕분에 선택의 폭은 넓었다.

하지만 이제 어느 동네를 가든 천편일률적인 대형 프렌차이즈 빵집뿐이다. 통계에 따르면 현재 대형 제빵 프렌차이즈인 파리바게트의 가맹점수는 2,000개를 넘은 지 오래됐고, 또다른 대형 프렌차이즈 뚜레주르는 1,500개에 육박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 사이 동네 아저씨, 옆집 총각이 운영하던 정겨운 동네 빵집들은 속수무책으로 전멸했다.

이에 대해 경쟁논리를 들먹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빵맛이 좋았다면 아무리 대형 프렌차이즈 빵집이 바로 옆에 들어선들 망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어느 누가 현대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결과적으로 동네 빵집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다 사라졌고, 빵집을 하던 사람들은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대형 프렌차이즈 빵집을 오픈하거나 전업했다.

그와 같은 일이 요즘 우리 동네에서 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업형 슈퍼인 SSM은 과거 동네 빵집들을 초토화시킨 대형 프렌차이즈 빵집들보다 무서운 기세로 동네 슈퍼의 기세를 꺾고 있다. SSM은 거대 자본과 축적된 마케팅 역량을 바탕으로 포인트를 두 배로 적립해주는 행사나 ‘1+1행사’, 저렴한 유통업체브랜드(PB) 상품 판매로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 동네 빵집을 사라지게 한 대형 제빵 프렌차이즈들. ⓒ김성배

실제로 SSM 법안 문제로 업계가 시끄러운 상황에서도 롯데슈퍼와 홈플러스익스프레스, GS슈퍼마켓은 출점 경쟁을 벌여왔다. 업계에 따르면 롯데쇼핑 슈퍼사업본부에서 담당하는 롯데슈퍼와 지역 소상공인들의 사업 조정 신청에 따른 여파로 점포 개점이 미뤄졌던 홈플러스익스프레스가 200호점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 또, 매장 수 150여개로 업계 3위격인 GS리테일의 GS슈퍼마켓은 GS마트와 백화점 매각에 의한 투자 여력을 집중시켜 상위 업체들를 따라잡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2년 전국적으로 240여개에 불과하던 SSM의 숫자는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며 현재 600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 동안 생계형 동네 슈퍼들은 하루 매출이 30~60% 감소하며 이미 폐업을 했거나 전업을 고려하며 하루하루 어렵게 가게 문을 열고 있는 형편이다.

기업형 슈퍼에 대한 시민들 반응은?  

“대형 슈퍼들은 일단 깨끗하잖아요. 조명도 밝아서 진열된 상품들의 신선도가 부각되는 것 같기도 해요. 제품들도 눈에 띄게 질서정연하게 진열되어 있어서 원하는 물건을 비교해가며 구입할 수 있는 장점도 있죠. 저녁 무렵에는 깜짝 세일이 벌어져 식자재를 싼 값에 구입할 수도 있어서 자주 방문하는 편이죠.”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위치한 홈플러스익스프레스에서 만난 주부 박한별씨(32세). 그녀는 과거에는 친분이 있는 동네 슈퍼를 이용했지만 이젠 SSM에서 물건을 구입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물건 값이 저렴하고 남편이 지방에서 근무하는 터라 딸아이와 단둘이 사는데 SSM에는 다양한 식자재가 소용량으로 포장되어 있어 경제적 쇼핑이 가능하다는 것.

하지만 인근의 한 슈퍼 앞에서 만난 주부 최현미씨(45세)는 SSM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사실 기업형 슈퍼에서 파는 물건들이 싼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1,000원 짜리를 990원에 판다든지 하는 편법이 보이거든요. 물론 몇몇 PB제품들은 저렴하지만 품질에 의심이 가고, 종업원들도 겉으로는 친절하지만 정감이 안 가요. 반면에 제가 주로 이용하는 동네 슈퍼 주인과는 서로의 대소사를 나누고 채소값이 오르면 함께 걱정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거든요. 저는 슈퍼가 단순히 물건만 팔면 그만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아요. 그런 식이면 동네 커뮤니티는 실종하고 사람 사는 게 삭막해지지 않을까요?”

▲ 기업형 슈퍼(SSM)들은 현재 무서운 속도로 동네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김성배

SSM과 관련한 해외사례는 어떨까. 물론 국내 SSM의 성격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프랑스의 경우 SSM 점포 개설은 허가제이고 대형마트는 대부분 도시 외각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10%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 인근의 소규모 상가들이 기존 매출에서 10%가 넘게 타격을 받는다고 판단되면 SSM은 출점할 수 없다.

소상공인 단체들은 국내 SSM의 경우, 거의 무혈입성하듯 기존의 동네 슈퍼들을 제압하고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는 거대 자본과 축적된 마케팅 역량, 정치권의 비호에 힘입어 갈수록 세를 키우고 있다는 것. 동네 빵집들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곁에서 사라졌던 것처럼 동네 슈퍼 역시 같은 운명에 처할 위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실효성 있는 정부대책 언제쯤…

지난 3일, 중소기업청은 전국에 200여개의 나들가게를 오픈했다고 밝혔다. ‘나들가게’는 정부 지원을 통해 매장진열, 서비스, 가격경쟁력 등을 강화한 중소형 소매점으로, 이 방식을 통해 동네 슈퍼들이 대형마트와 SSM에 맞설 수 있게끔 체질 개선이 가능할 것으로 정부 관계자는 보고 있다.

이는 나들가게 통합 공동물류센터와 공동구매, 공동배송을 통해 가격경쟁력과 협상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 중소기업청은 나들가게 사업 참여 점포에 1억원 한도 내에서 시설 개선자금, 간판교체 비용, POS(판매시점관리) 시스템 설치비용 등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상권분석과 상품기획, 상품재배열, 점포설계, 재개점 등을 컨설팅하고 개점 후에도 지속적으로 판매 및 재고관리 등의 점포 운영 전반에 대해 신경 쓰겠다는 것.

▲ SSM 매장(좌)과 일반 슈퍼 매장(우). 매장 크기와 인력의 차이로 SSM과 동네 슈퍼의 진열 상태는 다를 수밖에 없다 ⓒ김성배

중기청은 올해 안에 ‘나들가게’를 2,000여점 개설하고 2012년까지 1만여 점을 육성한다는 목표지만 관련 소상인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이는 이미 17년 전부터 전국의 동네 중소형 슈퍼들이 나들가게와 비슷한 형태의 ‘코사마트’라는 브랜드로 운영되고 있는 중이지만 SSM의 공세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기 때문.

또, ‘나들가게’ 자체가 동네 소형 슈퍼들을 잡아먹는 존재가 될 거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이는 2012년까지 1만여 개의 ‘나들가게’가 생겨나면 결과적으로 여력이 되지 않아 ‘나들가게’에조차 참여할 수 없는 소형 슈퍼들은 SSM과 ‘나들가게’ 사이에서 고사될 수밖에 없다는 것.

서울 양재동에서 15년째 슈퍼를 운영해온 윤모 씨는 “정부가 어떤 대책을 내놓아도 SSM에 대한 규제 방안이 먼저 마련되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라며 “이 상태라면 생업을 내팽개치고 반정부 투쟁이라도 해서 생존권을 지켜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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