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황제의 궁, '경운궁(慶運宮)' ①
대한제국 황제의 궁, '경운궁(慶運宮)' ①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11.2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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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둘러보기’ 26]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
경운궁(덕수궁)은 중구 정동에 위치해 있으며,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건국 초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상왕(上王) 태조 이성계의 개성 행궁 이름이 덕수궁(德壽宮)이다. 글자 뜻대로 ‘덕망 높이 오래오래 사시라’는 이름이니, 상왕 궁으로서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 1961년 경운궁(덕수궁) 담장 철거공사. ⓒ나각순
아울러 상왕 태종이 머물던 수강궁(壽康宮)의 ‘건강하게 오래 사시라’는 뜻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서울의 덕수궁은 고종황제가 헤이그특사 사건을 계기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강제 압력에 의해 상황제가 되어 권좌를 잃고 뒷방 신세로 전락하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1907년에 한국통감부의 실질적인 권력 장악으로 대한제국 황제위에 오른 순종은 창덕궁으로 옮겨가게 되자, 황제 궁이었던 경운궁은 무력해진 상황제가 머물게 되면서 덕수궁으로 격하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경운궁이 덕수궁으로 변하여 오늘날 불리고 있는 실정에 대하여 되돌아보고, 본래의 궁궐 이름을 되찾아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언론과 교육당국의 계몽활동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정릉동행궁에서 경운궁으로
경운궁은 광해군 3년(1611) 10월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을 경운궁으로 개칭하면서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여기서 정릉동이란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이 현재의 영국대사관·미국대사관저·덕수궁 일대에 있던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후에 정동으로 변하여 지금까지 법정동명으로 남아있다.

정릉의 원찰(願刹)이었던 흥천사가 있던 곳이 오늘날 덕수궁이 자리한 곳이고, 정릉은 태종 이방원에 의해 현재 성북구 정릉으로 옮겨졌다.

▲ 경운궁(덕수궁) 중화문. ⓒ나각순

정릉동행궁이란 정릉동에 있는 임시 왕이 머물던 궁궐이란 뜻으로, 선조 26년 10월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의주로 몽진(蒙塵)하였다가 돌아와 머문 시어소(時御所)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원래 세조의 장남인 덕종(의경세자) 비 인수대비가 궁에서 나와 살던 곳으로,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옛집이었다. 선조와 그 일행이 피난지에서 환도하여 행궁으로 삼았다.

선조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경내가 좁아 관아 등이 문 밖 인가에 접해 있어 일대의 민가를 행궁의 경내로 포함시켜 경역을 넓혔다.

선조는 이곳을 행궁으로 삼은 후 왕 41년 2월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으며, 뒤를 이어 광해군 역시 이곳 행궁 서청(西廳)에서 즉위하여 동왕 7년(1615) 4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할 때까지 이곳을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1611년에는 궁궐의 이름을 처음에 ‘흥경궁(興慶宮)’이라 하였다가, 다시 정식으로 ‘경운궁(慶運宮)’이라 칭하여 도성 내 왕궁의 하나가 되었다.

당시 창덕궁과 창경궁, 인경궁과 경덕궁의 중창 및 창건공사가 진행되는 것에 비하여 경운궁은 영건공사에서 제외되었다.

광해군 5년에는 영창대군이 폐출되고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사사되었다. 급기야 광해군 10년에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시키고 대비의 칭호를 삭탈하였으며, 궁호 또한 ‘서궁(西宮)’으로 격하시켰다.

이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경운궁의 별당인 즉조당(卽祚堂)에서 인목대비로부터 옥새를 받고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숙종 5년(1679) 5월 22일에는 쌀 50석과 면포 6동(同)으로 경운궁을 개수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의 황제 궁이 되다
이후 고종 33년(1896)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정동의 러시아공사관에 가 있던 고종은 경운궁의 수리를 명하고 경복궁 집옥재(集玉齋)에 봉안하던 열성조의 어진을 경운궁으로 옮겼으며, 명성왕후의 빈전 또한 경운궁의 즉조당으로 옮겼다. 이어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친위대 병정과 순검 및 배재학당 학생들이 도열한 가운데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이어하였다.

아울러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되어 경운궁은 황제국의 궁궐이 되었으며,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을 계기로 강제로 퇴위하고 순종이 이곳에서 즉위하여 창덕궁으로 옮길 때까지 국가통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경운궁은 외전과 내전 및 후원을 거느린 궁궐다운 규모를 갖추었으며 장대한 전각들이 건립되었다. 이후 고종은 태황제가 되어 경운궁에 그대로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경운궁은 옛 태조 이성계의 경우와 같이 상왕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덕수궁으로 고쳐졌다.

경술국치 후 덕수궁 이태왕으로 불리던 고종은 1919년 독살설이 분분한 가운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기거하였다.

▲ 고종(왼쪽)과 순종, 1890년경. ⓒ나각순
1897년 8월 16일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고, 원구단(圜丘壇)을 축조하여 그곳에서 고천지제(告天地祭)와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다음날 국호를 ‘대한’으로 정하였다.

즉 국호를 고대 삼한을 통합한 의미의 ‘대한’으로 하고, 연호를 ‘광무’라고 하여 문치를 우위로 삼았던 선비국가에서 한 단계 높여 이제 국방력을 튼튼히 갖추고 부국강병을 꾀하여 만국질서에 편승하여 개혁정치를 추진하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경운궁은 황제국의 궁궐로서 국제화 시대의 정치무대로서 그 규모를 일신하였다. 고종은 이미 그 13년(1876)에 경운궁을 수리하고 즉조당에 나아가 전배하였고, 선조 환도 5주갑을 맞는 고종 30년(1893)에는 세자와 함께 즉조당에 나아가 전배하고 백관의 하례를 받기도하는 등 일찍이 경운궁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아관파천 후 경운궁에 환어한 고종은 먼저 선원전의 영건을 분부하고 경복궁의 만화당‧선덕전(함녕전으로 개칭)‧보문각을 이축 또는 신축하였다.

이때 정전으로 즉조당이 사용되었는데, 1897년 10월 7일에 이 전각의 이름을 태극전(太極殿)이라 고치고 여기서 황제 즉위의 축하를 받았다. 이듬해 다시 중화전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광무 4년(1900) 1월에 궁의 담장공사를 끝냈다.

이 무렵 경운궁에는 중화전(즉조당)과 함녕전을 중심으로 선원전‧경효전‧흥덕전‧사성당‧준명당‧경운당‧덕경당‧함유재‧청목재‧숙옹재‧정이재‧대유재‧보문각‧대화각‧돈옥헌‧정관헌‧구성헌‧인화문‧돈례문‧회극문‧영성문 등 여러 건물이 있었으며, 원수부를 비롯하여 의정부‧궁내부 등 여러 관아가 배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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