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프랑스 여성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프랑스 여성들
  • 백연주
  • 승인 2010.12.03 11: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십만 프랑스인, 거리로 나와 '가정폭력 반대' 시위

프랑스 여성인권 보호단체인 ‘ni putes ni soumises’는 11월25일을 점차 증가하고 있는 ‘가정폭력에 대항하는 날’로 지정, 대대적인 캠페인을 펼쳤다. 심각한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일부 프랑스 여성들의 목소리를 되찾아주고자 마련된 전국적인 이 행사는 소외된 여성들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이끌어냈다.

이제껏 “나만 아니면 돼”란 식의 마인드로 빈번한 가정폭력을 나 몰라라 했던 프랑스 국민들은 행사에 참여한 미리암(60세)의 피해사례를 통해 가정폭력의 실체를 재조명하게 되었다.

현재 십여 평 남짓한 아파트에서 홀로 거주하고 있는 그녀는 1200유로(한화 약 150만원)인 파리 지역의 비싼 월세를 수개월 째 납부하지 못해 몇 주 후면 거리로 쫓겨나게 될 상황이다. 중산층인 남편을 만나 금전적인 문제는 없었다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내 몰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 프랑스 여성인권 보호단체(ni putes ni soumises) 홈페이지.
끔찍했던 시간
“남편이 출근할 때 신을 구두를 깜박하고 안 닦아 놓았을 때부터 시작됐죠.”라며 지우고 싶은 기억을 더듬는 미리암.

그녀의 남편은 이를 시작으로 사소한 문제에 민감해하며 매번 그녀에게 화풀이를 했다고 한다. 남편이 던진 요구르트 병에 맞아 얼굴이 부풀어 오르거나 작은 실수로 뺨을 맞는 것은 그녀에겐 일상이었다.

결혼 후 수년간 남편의 무차별한 폭력과 욕설에 시달려도 아이를 위해 사실을 감추고자 했던 그녀는 2000년, 생명에 위협을 느껴 성인이 된 아들에게 모든 것을 밝히고 집을 나온다.

남편을 피해 탈출한 그녀를 적극적으로 도운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외아들. 아들은 어머니가 침묵으로 견뎌야만했던 끔찍한 지난날을 알지 못한 것에 대해 큰 죄책감을 느끼며, 그녀가 아버지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다.

그러나 남은 인생을 아들에게 의지하여 보낼 수만은 없었던 미리암은 파리근교에 작은 아파트 월세를 얻어 생활하게 되었고, 재취업까지 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생각에 행복했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남편의 소행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고령이었던 그녀는 5년만에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고 퇴직연금을 신청하러 갔다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혼 전, 저는 한 건설회사의 회계였고 남편은 제 상사였어요. 그렇게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한 후 가사일과 육아 때문에 일을 그만뒀었지만 그래도 그 회사에서만 십년이 넘게 일했었고 이를 토대로 퇴직연금을 받을 수 있었죠. 그런데 5년 전 연금신청을 위해 찾아간 국립고용청에서 과거에 일했던 건설회사의 계약서, 월급수령서 등과 같은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며 신청을 거부당했고, 그 모든 것이 남편소행이란 걸 알았죠.”

수년간의 잔인한 폭력과 인격모독으로 미리암의 인생을 어둠으로 몰아넣었던 남편은 그걸로도 모자라 도망간 그녀가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도록 관련서류를 없애버린 것이다. 그녀는 당시에는 집에 남아있던 가구나 옷 등을 팔아서 가까스로 월세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 한계가 있어 현재 1년 가까이 월세를 지불하지 못하고 있다.

“아들은 이 사실을 몰라요. 사실을 알면 평생 자기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살텐데…. 부모로써 이 지경이 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은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사라져야 할 가정폭력
여성인권보호 단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당시, 미리암은 사흘째 아무것도 먹지 못해 영양실조 상태였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탈모와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현실이라고 믿기엔 너무나도 잔인한 그녀의 삶을 접하게 된 단체회원들은 성금을 걷어 그녀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매주 돌아가며 미리암의 냉장고를 가득 채워주기로 했다. 또한 이 단체의 회장은 미리암의 남편을 가정폭력범으로 정식 고소하고, 올바른 이혼절차를 통해 그녀가 합당한 위자료를 받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울 것이라고 밝혀 미리암에겐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미리암과 같이 가정폭력의 공포에 떠는 피해자들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기를 기원한 이날 행사에서는 스타들의 치마를 경매에 부쳤다. 이는 단순한 경매를 넘어 치마를 여성으로 상징화한 것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소피 마르소, 제인 버킨 등이 직접 소장했던 치마들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경매 수익금은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이 새 삶을 꾸려나가는 데에 쓰일 예정이다.

여성인권보호 대사로 활동 중인 세계적인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아자니도 행사에 참여, 적극적인 홍보에 힘썼다.

“아직도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이 프랑스에 남아있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한 여성으로써 피해자들을 보호하고, 지원해야 할 의무를 느낍니다. 남의 얘기라 생각하지 마시고, 이 운동에 함께 참여해주세요.”

행사 당일, 수십만 명의 프랑스 국민이 실제로 거리에 나와 가정폭력 반대시위를 함께 진행했고, 현재 전국 각지에서 미리암과 또 다른 피해자들을 위한 금전적, 정신적 지원활동이 끊임없이 퍼져나가고 있다.

아름다웠던 한 여성의 인생을 짓밟는 가정폭력. 프랑스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그늘이 아닌가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