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짬뽕집 주인, 17년 모은 외화 구세군에 기부
[서울 중구] 짬뽕집 주인, 17년 모은 외화 구세군에 기부
  • 김민자 기자
  • 승인 2010.12.23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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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서소문에서 '만리성'을 운영하는 이진강 씨

서울 중구 순화동에서 짬뽕가게를 운영하는 이진강(남, 47세) 씨가 17년 동안 손님이 준 팁을 모아 구세군에 기부했다.

그는 ‘만리성’이라는 중국요리집에 도금한 높이 30cm의 ‘황금 항아리’를 마련해 놓고 팁이 생길때 마다 모아왔다.

가게가 외국 여행 잡지에 소개돼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오다 보니 황금 항아리 안에는 각 나라의 돈이 모여 있다. 지난 2008년 12월에는 17년 동안 모은 외화를 구세군에 기부했지만, 워낙 다양한 나라의 돈이 모여 있다 보니 은행에서 환전하지 않고, 구세군이 유니세프에 그 돈을 보냈다. 그래서 이씨는 지금도 자신이 기부한 돈이 정확히 얼만지 모른다.

 “구세군에 기부하면서 느꼈던 행복은 서소문으로 가게를 옮긴 후 중구 행복더하기에 동참하면서부터 시작되었어요.”

화교인 이씨는 어려웠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 이런 선행을 결심했다.

중국 산둥(山東)성 출신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의 3남2녀 중 넷째인 이씨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58세였고, 부양능력이 없었다. 가난 탓에 이씨는 명동 한성화교소학교 6학년 때부터 연희동 한성화교중학 고등부를 졸업할 때까지 7년 동안 방학마다 중국요릿집에서 하루 12시간씩 배달과 허드렛일을 했다. 성적은 늘 꼴찌였고 학교에선 혼나기 일쑤였다.

고교 졸업 후 화교학교 동창인 아내 장덕주(47) 씨와 결혼했고 유명한 중국요릿집을 돌면서 자신은 주방, 아내는 홀서빙을 맡아 종업원으로 일했다. “나만의 메뉴를 가진 중국요릿집을 열겠다”는 꿈이 있었지만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1980년대 말 배달 전문 중국요릿집을 열었다가 배달원이 낸 교통사고 배상금을 무느라 빈털터리가 됐다. 1990년대 초 종로구 중학동에 다시 요릿집을 열어 홍합을 잔뜩 넣은 ‘홍합짬뽕’을 개발했지만 손님 반응은 냉담했다. 2003년 중학동 일대가 개발되면서 권리금도 못 건지고 나와야 했고, 서소문 고가차도 밑 지금 자리에 가게를 냈다.

행운은 2006년 2월 우연히 찾아왔다. 홍합짬뽕을 먹고 간 손님이 인터넷에 올린 사진을 보고 한 방송사 아침 프로그램 제작진이 찾아온 것. 15분 방송을 타고난 다음 날 가게 앞에는 손님 300여 명이 늘어서 있었다.

이씨는 돈을 번 뒤에도 어렵던 예전을 잊지 않았다. 2007년 초 항아리를 구해 홍합짬뽕을 팔 때마다 한 그릇에 100원씩 넣었고, 이젠 팁을 넣고 있다.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다는 그에게 박종성 소공동장(현 중구 사회복지과장)이 다리를 놓아 중구 행복더하기와 인연을 맺었다. 그래서 한달에 10만 원씩 저소득층을 위해 내놓았다. 설과 추석, 연말연시에는 저소득층 주민들이 따뜻한 명절과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매번 성금도 냈다.

화교들이 지역사회 활동은 잘하지 않다보니 지금까지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지만 너무 신났다. 화교라고 해도 소공동 주민들이 그들을 따뜻이 보다듬었다. 그것이 더 고마웠다. 그래서 동네 일이라면 두손 두발 들고 뛰어다녔다.

그 결과 이씨는 지난 2009년부터 소공동 주민자치위원으로 활동한다. 부인인 전씨도 바르게살기위원회는 물론 행복더하기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누는 기쁨을 알자 일하는 즐거움도 생겼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손님이 곱으로 늘었다. 특히 공중파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손님이 떼로 몰려왔다. 주방에서 일하는 그는 손님들을 위해 더욱 더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었다. 재료를 아끼지 않고, 음식에 듬뿍 넣었다. 하루 묵히기 보다는 즉석에서 요리해 손님들에게 제공했다. 인공조미료 대신 홍합을 갈아서 육수로 만들었다.

“체인점을 하자는 제안도 많이 왔지만 다 거절했습니다. 지금 이 상태 만으로도 행복하거든요.”

봉사하는 재미를 느끼면서 이전에 1년 2차례 하던 부부 해외여행도 뚝 끊었다. 그리고 그것을 전부 봉사하는데 투자했다.

그는 모교인 한성화교학교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중고등학교에 매년 100만 원씩 책을 기증했다. 체육복과 운동기구도 기증했다. 2008년에는 고등학교에 1개 15만 원 상당의 시계 35개를 기증해 교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꼴찌만 하던 학생이 성공해 모교에 기증했다고 하니 화교 사회에 큰 화제가 되었고, 대만에서 취재를 나오기도 했다.

행복더하기를 하면서 이씨가 받은 행복은 더하기만 하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라 한국에 묻히겠다는 그의 말은 그래서 더욱 의미있게 들린다.

하나뿐인 아들이 군대에 가고 싶어도 화교라서 가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 이씨는 “지금 이 행복 그대로 쭉 이어졌으면 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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