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12.31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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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 29]
▲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나각순 제공]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는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재료는 화강암이고 규모는 높이 154㎝, 너비 69㎝, 두께 16㎝이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 산 3번지, 삼각산 서남쪽 승가사 위쪽 800m 떨어진 해발 556m 비봉 정상에 국보 제3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가 있던 곳임을 알려주는 ‘사적 제228호 신라진흥왕순수비 유지를 알리는 본래의 비석을 모형으로 만든 새로운 복제비가 세워져 있다.

이전에 있던 순수비 유지 뒷면에는 ‘이곳에 세워졌던 진흥왕순수비가 1400여 년의 오랜 풍우로 그 비신 보존이 어려워 이를 안전하게 관리하게 위하여 1972년 8월 16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고 그 유지를 사적으로 지정한다’고 새겨져 있었다.

비봉에 오르면 동쪽과 북쪽으로 북한산의 준령이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한강의 도도한 물줄기가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으며, 서쪽 방향으로는 한강 하구와 일대 김포평야 및 고양의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멀리 임진강 하구를 전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전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유지. [나각순 제공]
이러한 지리적 조건이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왕의 순행이 있었고, 그를 기념하기 위한 순수비를 세우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 비는 삼국시대 신라의 진흥왕(재위 540-576)이 한강의 하류지역을 새로운 영토로 편입시킨 뒤 이 지역을 돌아보고, 그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라고 할 수 있다.

비석 형태는 장방형으로 가공된 석재를 사용하여 자연 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글씨는 모두 12행인데 한 행 32자이다. 비문에는 승가굴에 승려가 있다는 내용과 순행한 신하 명단·소속부명(所屬部名)·관계명(官階名)·관직명(官職名)을 기록하고 있어 신라 6부제와 17관등제의 구조를 확인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즉, 내부지(內夫智), 미지(未智), 굴정차(屈丁次), 사훼(沙喙), 남천군주(南川軍主), 한성(漢城), 일척간(一尺干), 급간(及干), 대마말(大奈末), 나말(奈末) 등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중앙박물관 전시실로 옮겨 보호받게 되었다. 따라서 그 유지를 사적으로 정하고 그를 표지하는 비석을 세웠는데 그 당시 원 비석의 아랫부분에 길이 7cm, 두께 3cm의 철심이 암반에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비는 조선 초에 활약한 무학대사(無學大師) 자초(自初)의 비로 알려져 왔다. 이렇게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는 비석이 세워진 이래 1200여 년 동안 그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 순조 16년(1816)에 독창적인 서체로 추사체를 쓴 31세의 김정희에 의해 발견되었다.

즉, 조선 후기의 유명한 금석학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1816년 친구 김경연과 더불어 비봉에 올라 비문을 판독하고 탁본하여 연구한 결과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밝히고, 이듬해 벗 조인영과 다시 확인하고서 당시 김정희가 이곳을 방문하여 비문을 판독한 사실을 새겨놓았다.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김정희의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에 실려 있다. 비석은 직육면체의 화강암으로 자연 암반 위에 새긴 2단의 얕은 받침에 세워졌다.

비석 상단에는 덮개돌을 끼우는 부분이 있으나 덮개돌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1972년 8월 25일 비의 보존을 위해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덮개돌은 현상금이 걸린 채 비봉 아래 기슭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 지금의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유지에 세운 복제비. [나각순 제공]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를 세운 목적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진흥왕이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표방하는 한편으로 패도정치(覇道政治)를 강조함으로써 신라의 무력적 우위를 내세우고, 이미 한강유역을 지배하는 ‘패주(覇主)’로서 군림하였음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진흥왕 자신이 직접 북진정책을 공표하고, 이를 달성하고자 하는 의욕을 천명하고자 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비문은 모두 11줄로 각 줄에 22자 정도 새겨져 있다. 표면이 심하게 마멸되어 반 이상이 판독되지 않는데, 대략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찬양하고 이 지역을 순수한 사실이 새겨졌다고 여겨진다.

건립 연대는 비문에 연호(年號)나 간지(干支)가 보이지 않아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진흥왕 16년(555) 왕이 북한산에 왔다갔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그해에 건립되었다는 주장이 있고, 정황상 그보다 뒤로 보고 진흥왕 29년(561) 건립설과 또 561년 이후 설이 있는 실정이다.

▲ 새로 제작된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나각순 제공]

북한산 순수비 건립은 대개 진흥왕의 다른 순수비로서 경상남도 창녕에 세워졌던 진흥왕 22년(561)의 ‘창녕비(昌寧碑)’와 함경남도 함흥에 세워졌던 568년(진흥왕 29)의 ‘황초령비(黃草嶺碑)’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러한 순수비 이외 마운령비, 적성비 등이 있어 신라의 영토 확장과 한강유역으로의 진출 사실 및 신라의 통치조직과 지방조직을 알 수 있는 금석문의 가치를 높이는 자료가 된다.

따라서 신라사 연구의 귀중한 기초사료이다.

여기서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의 비문은 12행으로 행마다 32자 해서체로 새겨져 있으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碑文:眞興太王及衆臣等巡狩□□之時記

□□言□令甲兵之□□□□□□□覇主設□賞□□」
□□之所用高祀西□□□□□相戰之時新羅太王□」
□□德不□兵故□□□□□□建文大得人民□□□」
□□是巡狩□□□□□□□□□□如有忠信精誠□」
□□□可加賞□□以□□□□□□衆路過漢城陟□」
□□□見道人□居石窟□□□□刻石誌辭□□□□」
□□尺干內夫智一尺干沙喙□□智迊干南川軍主沙」
□□夫智及干未智大奈□□□□沙喙屈丁次奈□□」
□□□□指□空幽則□□□□□□□立所造非□□」
□□□□□巡狩見□□□□□□□□□記幷□□□」
□□□□□□□□□□□□□□□智□□□□□□□」

◆ 追刻:此新羅眞大王興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金敬淵來讀」
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同來審定殘字六十八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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