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후손들이 사는 법
프랑스의 후손들이 사는 법
  • 백연주
  • 승인 2011.01.07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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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연주의 ‘프랑스 엿보기’]

누구의 아들인 자와 그 누구의 아들도 아닌 자

공연예술계는 물론 정계, 문화, 산업 등 프랑스의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점차 증가하고 있는 유명인사의 후손들. 과연 ‘ㅇㅇ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출세의 지름길일까 아니면 떨쳐버릴 수 없는 핸디캡일까?

2008년 사르코지 대통령이 당시 24세였던 작은 아들 쟝 사르코지를 파리 한 지방의회의 중역으로 임명하면서 국민들의 본격적인 관심과 비난을 동시에 받기 시작했다.
 
이른바 다이너스티 시스템의 중심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본다. 

물려받은 것은 이름 뿐

20년째 크고 작은 바에서 노래하며 모은 자비를 털어 생애 첫 소규모 콘서트를 준비 중이라는 줄리앙 불지(Julien Voulzy). 30대 후반의 그는 이렇다할 수입이 없어 어려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해 여전히 파리를 전전하고 있었다.

▲ 로렁 불지.


그러나 줄리앙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은 이런 그의 떠돌이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70~80년대 프랑스 가요계를 주름잡으며 4백만장의 앨범 판매고를 기록한 전설의 가수 로렁 불지(Laurent Voulzy)가 바로 그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줄리앙은 “초반엔 아버지가 여러 유명 음반사에 전화를 걸어서 제가 오디션을 볼 수 있게 배려해 주셨죠. 하지만 사람들은 제가 로렁 불지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남들보다 우월한 실력을 가졌을거라 기대했기 때문에 늘 통과하지 못했어요”라고 말했다.

“내 아들 좀 봐달라”는 가요계 스타 아버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제대로된 앨범 한장 내본적 없다는 줄리앙. 그는 점차 성장하면서 ‘누구의 아들’이라는 편견에 회의를 느꼈고 현재는 예명을 쓰며 음악인생을 이어나가고 있다.

파리 센강 근처에 위치한 아버지의 개인 녹음실에서 조심스레 첫 앨범을 준비하는 그는 매달 아버지에게 녹음실 월세를 낸다. “이젠 아버지의 이름을 등에 업고 무언가를 이루고 싶진 않아요. 아버지 녹음실을 정식으로 돈 내고 빌리는 것도 완벽한 독립의지의 일부라고 할 수 있죠”

이와 같은 상황은 마리 아멜리 세니에(Marie Amélie Seigner)도 마찬가지이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프랑스 코미디계의 거장 루이 세니에, 큰언니 엠마뉴엘은 영화배우이자 세계적인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이며 작은언니 마틸드는 현재 프랑스 영화계에서 최고고액의 출연료를 받는 여배우 중 한 명이다.

세니에가의 막내 딸인 마리 아멜리는 15년째 인디음악가로 활동하며 언젠가 언니들처럼 스타가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어딜가나 제일 먼저 듣는 말이 ‘너 마틸드 세니에 동생이지?’라던가 ‘성이 세니에면 그 유명한 배우가족 맞지?’ 등 제 이름에 관한 것들이죠. 제일 듣기 힘든 말은 ‘그런데 넌 무슨일 하고 있니?’예요. 전 나름대로 의지를 가지고 음악을 해왔다고 생각하는데 언니나 할아버지의 명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들 하죠”

현재 작은 음반제작사와의 계약을 통해 데뷔앨범을 녹음 중인 그녀는 가족의 이름으로가 아닌 자신의 실력으로만 승부하고 싶다고 말한다. “평생 유명한 가족들 안부나 전해주며 살 수는 없잖아요. 돈이야 언니들이 잘 버는거고 유명한 것도 언니들이지 제가 아니죠. 저도 빨리 스타가 되고 싶어요”

이렇게 물려받은 이름이 오히려 개인적인 성공에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유명한 이름없이 자수성가한 이들도 있다.

버림받는 것도 행운

쟝 마리 카바다(Jean Marie Cavada)는 스타부모에게 물려받은 이름없이도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부 기자로 시작해 프랑스 방송의 비중있는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자를 거쳐 현재 프랑스를 대표하는 유럽의회 의원인 그의 화려한 경력은 오로지 그가 70년 인생동안 일궈낸 땀의 결과이다.

그는 1940년 태어나자 마자 전쟁의 그림자 속에 부모로부터 버려져 고아원과 수많은 보호가정을 전전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처음엔 고아원에서 지내다가 일곱살이 되던 해부터는 일손을 필요로 하는 지방의 여러 가정들을 돌며 살았어요. 하교 후엔 늘 농장이나 밭에서 막일을 해야했죠”

▲ 쟝 마리 카바다.
가끔은 운이 없어 악덕가정에 맡겨지기도 했던 쟝 마리는 구박과 노동강요 등으로 어린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머릿 속엔 ‘빨리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얼까’라는 질문만이 맴돌았다.

그는 “그 때 맘을 먹었던 것이 나라에서 내게 주는 혜택을 최대한 활용하자였죠. 예를 들면 생활보조금이나 의무교육이 그래요. 매달 받는 보조금은 쓰지 않고 파리로 올라가기 위해 저금했고 학교에선 남들보다 두세배는 더 공부했어요.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죠”라고 말했다.

그 결과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프랑스의 공신력있는 최대 라디오방송사인 프랑스 인터(France Inter)에서 사회부 기자생활을 시작한다.

유명한 부모의 도움도, 파워있는 지인의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순전히 혼자의 힘으로 유럽의회 의원이자 Nouveau Centre 파의 부총재자리에까지 오른 그는 과연 ‘누구의 아들’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

그는 “좋은 가문에서 유명한 부모밑에 자라나는 건 큰 행운이죠. 하지만 그 행운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해서 오히려 인간적 성장에 차질을 빚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반대로 스타부모는 커녕 평범한 부모도 없이 자란 저같은 경우가 있죠. ‘누구의 아들’들을 부러워 해본적은 없어요. 난 부모로부터 버려졌던 불행을 행운으로 변화시킨 장본인이니까요”라고 답했다.

‘ㅇㅇ의 자녀’와 그 누구의 자녀도 아닌 극과극의 사람들. 오늘날 그들 모두는 자신들의 꿈을 위해, 보다 나은 인생을 위해 달려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아들, 딸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스스로가 ‘누구’가 되기위해 노력할 수 있는 열정과 자신감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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