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조선 왕릉(朝鮮王陵)②
세계문화유산, 조선 왕릉(朝鮮王陵)②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1.14 09:1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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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 31]

왕릉의 위치·조영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무덤은 44기로 현재까지 모두 남아있다. 42기는 능이라 하며, 2기는 폐위된 왕인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으로 묘라고 부른다. 능 40기와 묘 2기는 남한에, 태조 이성계의 원비인 신의왕후의 제릉과 제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 2기는 개성에 있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한양도성으로부터의 거리, 주변 능과의 거리, 방위, 도로와의 관계, 주변 산세 등과의 관계를 신중히 고려하여 결정하였다. 조선 왕릉의 입지는 왕릉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자연의 지세를 존중하는 자연조화적인 조영방법을 따랐다.

▲ 서오릉 내 홍릉.
왕릉은 대부분 한양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안에 마련되었다. 즉 한성부의 행정구역이자 생활권에 성저십리라 하여 서울성곽을 중심으로 대개 10리(약 4km) 밖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권역 밖으로부터 왕이 하루 행차할 수 있는 거리를 100리(약 40km)로 잡아 설정된 구역이라고 한다.

실제로 조선의 왕릉은 북한에 위치한 후릉과 여주의 영(英)·영릉(寧陵), 영월의 장릉(莊陵)을 제외하면 모두 서울 4대문으로부터 100리 내에 위치하고 있다. 궁에서 떠난 참배의 행렬이 어렵지 않게 닿을 수 있는 곳이면서 도성과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가 조선시대 왕릉 입지의 첫 번째 기준이었다.

이러한 거리상의 문제를 전제로 하고 조선 왕릉의 터를 잡을 때에는 풍수상의 길지를 택하기 위해 신중을 다했다. 풍수에 밝은 지관이 몇 군데 후보지를 골라서 최종적으로는 임금이 가장 좋은 조건의 터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조선시대 원묘 또한 대부분이 서울 시내나 근교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왕실의 일원으로 왕릉 인근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강 이북에 위치한 대부분의 원묘는 서울의 도시 확장에 따라 구획정리사업 등으로 인하여 1930년대 신설된 서삼릉 경내 새로 마련된 묘역과 서오릉 경내 등으로 이장되어 원래 위치에 남아 있는 원묘는 많지 않다.

아울러 서삼릉 경내의 신설 묘역으로 이장된 빈․귀인․숙의 등의 묘소들은 봉분·혼유석·표석만이 같이 옮겨지고, 한곳에 집단으로 모여져 있기 때문에 본래의 구조와 형식은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이다. 그 외 남양주시의 광릉과 홍릉·유릉 인근에 관련 왕실의 원묘가 분포되어 있다.

이와 같이 조선 왕릉의 위치 결정에 있어서 풍수지리적 요소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즉, 바람·물·불·나무·흙 등에 의해 야기될 수 있는 다섯 가지의 화가 생길 염려가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뒤로 주산이 펼쳐지는 가운데 산허리에 봉분이 위치해야 했다. 그리고 청룡과 백호라고 일컬어지는 산맥이 좌우를 감싸며, 봉분 맞은편에 마주하는 산맥이 있어야 훌륭한 자리라고 여겼다.

풍수의 기본 요소는 산(山)·수(水)·방위(方位)로서, 그 결합된 형태가 각 능의 산국지도(山局地圖)로 나타난다. 여기서 능의 중심인 혈과 방위 및 구역의 범위가 정해진다. 혈은 사신사(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에 의해 생기가 모이나 흩어지지 않는 지형상의 중심이 된다.

방위는 5행·8괘·10간·12지에 따른 24방위를 고려하게 되는데, 기본적인 것은 음양오행이다. 즉 혈과 사신사의 방위는 음양오행을 고려하여 정해진다. 그리고 내룡(來龍)의 혈을 형성하는 지형을 중심으로 사신사의 격에 해당되는 전체 영역을 능역으로 삼는다.

나아가 왕릉은 다른 주변의 시설로부터 격리시켜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해 두 겹 정도의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선․정릉과 같이 사신사가 없는 곳도 있었으며, 이런 경우 촌寸이나 척尺의 구릉을 산으로 삼고, 그 이하를 물로 삼아 능을 조성하였다.

사신사 산세는 혈이 위치한 내룡 즉 주산이 북현무가 되고, 왼쪽 산이 청룡, 오른쪽 산이 백호가 되며, 물을 건너 앞산(안산)이 남주작이 된다. 여기서 주작과 현무는 풍수의 국을 형성하는 음양의 주체로서 음래양수(陰來陽受)를 상징하며, 청룡과 백호는 호위와 장풍(藏風)을 조성하는 종속적인 위치가 된다.

음양오행설에 따른 풍수의 사신사에 의한 공간구성은 동·서·남·북과 중앙의 5개 구역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오행과 연관되어 있다. 즉 동쪽은 춘(春)·목(木)·청(靑)·용(龍), 서쪽은 추(秋)·금(金)·백(白)·호(虎), 남쪽은 하(夏)·화(火)·적(赤)·봉(鳳)과 명(明)·양(陽), 북쪽은 동(冬)·수(水)·흑(黑)·귀(龜)와 암(暗)·음(陰)과 관련되는 지역이다. 중앙은 토(土)·황(黃)에 해당하는 곳으로 인간의 활동영역이며, 특정 기운이나 계절인 방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충기(沖氣-하늘과 땅 사이의 잘 조화된 기운, 양과 음이 잘 조화된 기운)를 상징한다.

한편 풍수의 생기 감응과 음양 결합이 4방위와 관련되어 좌향(坐向)이 결정되며, 24방위에 의해 길흉이 구별된다고 한다. 즉 24방위는 5행의 5방위, 8괘의 8방, 10간의 10방, 12지의 12방위를 서로 맞추어 놓은 것인데, 이들이 결합된 방위에 따라 능의 좌향이 마련된다.

따라서 현재 많은 왕릉이 자리 잡은 도성 안팎의 장소들은 각 시대 여건에서 판단한 가장 이상적인 장소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릉을 조영할 때에는 가급적 본래의 지형 조건을 훼손하지 않고 지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최소한의 인공적인 시설을 설치하려는 자세를 갖추었다.

또한 조선시대 왕릉은 시간이 흐르면서 일정한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 형태는 능에서 정기적으로 치르는 각종 제례 절차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적절한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능 근처에는 제례를 준비하는 재실을 마련하였다. 재실을 지나 숲길을 따라가면 물길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만나고, 왕릉을 상징하는 홍살문을 통과하여 능의 중심부로 접어들게 된다. 봉분 앞에는 다양한 석물과 문석인․무석인 등의 기본적인 구성이 갖춰진다. 조선 왕릉은 이러한 기본 구성을 유지하면서 지형조건과 시대적 배경 등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어 왔다.

한편 능의 입지를 선택하는데 있어서는 많은 여건과 요소를 고려하여 수개월 내지 수년의 세월이 걸리기도 하였다. 또한 이미 조영한 왕릉을 풍수상의 길지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옮기는 절차를 행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장경왕후 희릉 조성과 천장에 관련하여 상대 정치세력의 교체를 가져오듯이 정치적 역학관계가 작용하기도 하였다.

▲ 건원릉 문석인 무석인 석마.

국상(國喪)을 위한 3도감(都監) 설치

조선시대에는 왕의 3년상인 국상을 치루기 위해 임시기관인 빈전도감(殯殿都監)·국장도감(國葬都監)·산릉도감(山陵都監)이 설치되었다. 각 도감에는 제조(提調)를 두고 세 도감을 총괄하는 도제조(都提調)에는 좌의정을 임명하여 총호사(摠護使)라고 하였다. 총호사는 장례를 포함한 모든 상례를 관장하였다. 여기서 세 도감의 역할과 구성에 대해 살펴보자

빈전도감은 왕의 임종에서 성복까지, 성복 후에는 왕의 관을 모신 빈전 및 장례 후에는 3년상이 끝날 때까지 궁궐 내에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에 관한 일을 맡는다.

왕세자, 대군 이하의 왕자, 왕비, 왕세자빈, 내외명부, 종친과 백관에 대한 상복 준비 역시 빈전도감의 역할이다. 제조 3명, 도청(都廳) 1명, 낭청(郎廳) 6명 등을 두었는데, 제조 3명 중 1명은 예조판서가 맡고, 낭청 6명 중에 1명은 예조낭청으로 임명하여 충당하였다.

국장도감은 일반적으로 왕이 승하한 당일에 조직하고, 장례 뒤 우제가 끝날 때까지 약 5개월 동안 존속하며 국장 진행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과 문서들을 총괄 제작하였다. 국장도감 아래에는 일방·이방·삼방을 설치하였다.

일방은 왕의 옥체와 부장품 등 다양한 물품을 운반하는 가마와 그에 따른 부속품, 제구류를 주로 제작하였다. 이방은 길흉의장, 왕의 의복과 장신구, 명기 등을 제작하였다. 삼방은 시책, 시보, 애책 등과 만장, 제기를 제작하였다.

제조 3명, 도청 2명, 낭청 6명, 감조관 6명 내외 등을 임명하여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제조 3명은 호조판서·예조판서·선공감제조로 구성하였으며, 낭청은 예조낭청·공조낭청·선공감·제용감의 관원으로 임명하여 충당하였다.

산릉도감은 왕의 능을 조성하는 일을 맡은 기관이다. 왕이 승하한 날로부터 보통 5개월 후에 있을 장례 의식 전까지 능의 조영을 마무리해야 했다. 산릉도감이 설치되면 지관(地官)은 능을 조영할 지역을 가린다.

능을 어느 곳에 둘 것인가는 당시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고, 이를 두고 정치적인 대립이 생기기도 하였으며,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훗날 천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산릉도감의 당상관, 관상감의 영사, 제조, 예조의 당상관 등은 신중하게 능지를 결정하고, 회의를 거쳐 공사일정을 확정하고, 필요한 인력을 산정한 후 공사를 시작한다.

능을 조영하는 과정에는 석물을 제작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흙을 다지고 풀을 뽑는 일, 정자각 등의 건물을 만드는 일 등이 포함되어 많은 인력이 요구되었다.

산릉도감의 인력은 17세기 초까지 백성들에게 부역의 형태로 조달하였으나, 이후에는 경상도․전라도와 같이 먼 거리는 부역 대신 포를 거두어 필요한 인력 일부를 모집하여 노동력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한편 고종과 순종의 경우는 일제강점기에 장례를 치르게 됨으로써 장례의 주무 관청은 일본 궁내성이었고, 일제의 결정에 따라 일본식이 가미된 장례의식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세 도감의 이름도 궁내부 산하의 빈전혼전주감(殯殿魂殿主監)·어장주감(御葬主監)·산릉주감(山陵主監)으로 변경되었다.

조선시대 국상을 치를 때마다 각 기관에서는 담당 업무 내용과 국장 준비 과정을 자세히 기술하여 의궤(儀軌)를 편찬하였다. 그 기록은 매우 세밀하고 정교하여, 조선시대 국장의 진행상황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좋은 자료임과 동시에 의궤 자체로도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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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내훈 2011-01-16 09:48:23
좋은 감사합니다. 읽으며 눈을 뗄수없을만큼 간결하면서도 풍수에 조회가 깊은 역사학자다운 고찰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많은 공부했고 이래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간혹은 조선왕릉이 뭐 볼게 있어 세계문화유산냐?의 의문점들을 갖고있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