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조선 왕릉(朝鮮王陵) ⑤
세계문화유산, 조선 왕릉(朝鮮王陵) ⑤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2.0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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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둘러보기’ 32]

자연경관 보존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조선 왕릉의 신성함과 가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숲으로 이루어진 왕릉 주위의 경관이 유지되었다.

도시개발에 의해 도심에 위치한 왕릉이 빌딩 사이에 묻히게 되어서도 고유한 경관은 유지되었고, 그 노력은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도심에 위치한 선릉.

이러한 경관 유지를 위한 노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시대 이래 각 왕릉에는 영令 혹은 직장(直長)이라 일컫는 종5품 관리 1명, 종9품인 참봉(參奉) 1명이 배치되어 관리를 맡았다.

이들은 이미 조영된 능역에서 행해지는 공사를 총감독하였고, 적게는 30명에서 많게는 100명에 이르는 능의 수호군(수릉군)을 관리하였다. 이들은 매일 능군 2명을 뽑아서 왕릉 주위를 순찰하게 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문화재청 공무원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둘째, 병충해로부터의 능 주위 산림보호에 온 힘을 기울였다. 왕릉은 겹겹이 산으로 에워싸인 곳에 위치하며, 이에 더하여 인공적으로 산림을 조성하였으므로 산림의 관리가 매우 중요하였다.

당시 병충해의 피해가 심각하여 시절에 따라 인근 주민들을 동원해 능 부근 20리까지 송충이 등의 벌레를 잡아 없애기도 하였다.

정조 임금이 화성행차 때 장조(사도세자)의 융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지대 고개의 소나무에 있는 송충이를 씹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듯이 능역의 송충이 제거는 국가적 관심사였다.

셋째, 산불로부터 능 주위 산림보호에 온 힘을 기울였다. 조선 왕릉은 내사산 밖에 화소(火巢)를 두었는데, 선릉의 경우에는 둘레의 길이가 8㎞(20리)에 달하였다.
 
화소란 글자 그대로는 불길이 머무는 곳이란 뜻으로 능역 바깥에서 발생한 불길이 능역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방화벽의 일종이다. 이 화소 구역에는 산불을 막기 위하여 집과 무덤 등을 마련하지 못하게 하고, 나무나 풀까지 모두 불살라 버려 자라지 못하도록 하는 철저한 화재 예방책을 강구한 것이다.

넷째, 능역의 수목관리를 철저히 하였다. 능역에서 무단으로 나무를 벤 사람은 붙잡아 치죄하고 죄가 무거운 경우에는 예조로 압송했다. 식목 행사도 빠뜨리지 않았는데 매년 10월에는 능역 안 적당한 곳을 가려 소나무 같은 나무를 식목하는가 하면, 매년 가을에는 상수리나무를 파종하기도 했다.

실질적으로 현재 국립수목원으로 운영되고 있는 광릉 숲을 비롯하여 원종의 장릉 숲, 헌릉의 오리나무 숲 등 조선 왕릉의 주위는 우거진 숲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숲은 자생한 수풀과 사람이 조성한 인공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 왕릉은 인공으로 숲을 조성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조성된 산림은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능을 조영할 당시 심었던 나무의 종류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숲에 남아있는 나무들과 1920년~1930년대에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의하면 능의 좌우와 내룡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한반도에는 약 5000년 전부터 현재와 같은 소나무림의 경관이 성립되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삼림에서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소나무가 풍수사상에 의해 선정된 명당자리에 심는 가장 중요한 수목으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능의 앞 방향 낮은 지대에는 오리나무를 주로 심어 무성한 숲을 이루게 하였다.

이상과 같이 조선 왕릉은 사후의 왕을 모시는 지하 궁궐로서 지엄한 공간으로 인식되어, 그 경관 보전을 생명과 같이 여겼던 것이었기에 오늘날까지 보전되어 그 문화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 최초의 동원이강릉인 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 [나각순 제공]

봉분의 여러 형태

조선시대의 왕릉은 자연의 지세와 규모에 따라 봉분의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 왕릉을 대분류인 강(綱)과 그 하위인 목(目)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분류 강은 그리고 정자각 뒤 능침에 모신 분의 수, 봉분의 수, 봉분의 위치에 따라 6종류의 형태로 구분된다.

즉 왕이나 왕비 한 분이 모셔져 있는 단릉(單陵), 왕과 왕비가 같이 모셔져 있는 합장릉(合葬陵)·쌍릉(雙陵)·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삼연릉(三連陵) 등이 있다.

그리고 계비의 존재에 따라 쌍릉과 단릉의 결합 형태 등 특이한 형태로 조성되기도 하였다. 이는 왕릉 또한 자연 환경의 일부로 여기는 풍수사상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정혈(正穴)은 항상 왕의 능침이 된다.

대분류를 더 세분화한 2차 분류인 목의 경우는 합장릉은 다시 동봉이실 합장릉과 동봉삼실 삼합장릉으로 구분되고, 동원이강릉은 2강릉과 3강릉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단릉은 글자 그대로 왕이나 왕비가 홀로 모셔진 능을 말하는데,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하여 제릉(齊陵)·정릉(貞陵)·장릉(莊陵)·사릉(思陵)·공릉(恭陵)·순릉(順陵)·정릉(靖陵)·온릉(溫陵)·희릉(禧陵)·태릉(泰陵)·익릉(翼陵)·휘릉(徽陵)·혜릉(惠陵)·홍릉(弘陵) 등이 해당된다.

이 중 홍릉(弘陵)은 우허제(右虛制)에 의해 쌍릉으로 조성 예정이었으나, 단릉으로 남게 되었다.

(弘陵)

합장릉은 왕과 왕비 2인 또는 왕․원비․계비 3인이 한 능침에 모셔지고 봉분은 하나로 된 능을 말한다. 영릉(英陵)·장릉(長陵)·융릉(隆陵)·건릉(健陵)·인릉(仁陵)·수릉(綏陵)·홍릉(洪陵)이 이에 해당된다.

그리고 유릉(裕陵)은 합장릉 중 유일한 형태로 순종효황제를 가운데로 하여 오른쪽에 순명효황후, 왼쪽에 순정효황후를 모셨다. 신 유일한 삼합장릉 또는 동봉삼실(同封三室)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릉은 좌왕우비로 묻혀 있어 일반적인 우왕좌비의 구조를 벗어나 있다.

쌍릉은 왕과 왕비의 재궁과 봉분이 따로 마련되어 외형으로 보아 두 봉분이 좌우에 나란히 붙어 조성된 형태를 말한다. 즉 평평하게 조성한 언덕에 하나의 곡장을 둘러 왕과 왕비의 봉분을 우양좌음의 원칙에 의해 쌍분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후릉(厚陵)·헌릉(獻陵)·연산군묘·효릉(孝陵)·강릉(康陵)·광해군묘·숭릉(崇陵)·원릉(元陵)․장릉(章陵)․영릉(永陵) 등이 해당된다.

한편 숙종의 명릉(明陵)은 계비 인현왕후와 쌍릉을 이루고 제2계비 인원왕후 능과는 동원이강 형태를 하고 있다. 그리고 원비 인경왕후는 익릉으로 별도의 단릉으로 조성되어 있다.

동원상하릉은 혈이 좁아 쌍릉을 조성하는 경우 정혈을 비켜가게 됨으로 상·하의 혈에 능을 조성하였다. 영릉(寧陵)과 의릉(懿陵)이 이에 해당되는데, 위에 왕의 봉분이 위에 있고 왕비의 봉분이 아래에 자리한 상왕하비의 형태이다.
▲영릉


동원이강릉은 넓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 뒤로 왕릉과 왕비릉이 언덕을 달리하여 봉분과 상설을 배치한 형태를 말한다.

현릉(顯陵)·광릉(光陵)·경릉(敬陵)·창릉(昌陵)·선릉(宣陵)·목릉(穆陵)·예릉(睿陵)이 이에 해당된다. 이 중 선조의 목릉은 정자각에서 보아 왼쪽 언덕에 선조, 가운데가 원비 의인왕후, 오른 쪽이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세 봉분이 서로다른 언덕에 조성된 동원이강릉이다.

그리고 추존왕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은 우왕좌비가 아닌 좌왕우비로 배치되어 일반적인 구조를 벗어나 있다.

삼연릉은 한 언덕에 왕과 원비·계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하고 곡장을 두른 형태를 말한다. 헌종의 경릉(景陵)이 유일하게 이에 해당된다.

▲경릉


우왕좌비의 원칙에 따라 헌종이 오른쪽, 원비 효현왕후가 가운데, 계비 효정왕후가 왼쪽에 있다. 능 앞에서 보면 좌우가 반대가 되는데, 서쪽을 위로 하는 종묘의 서상제(西上制)와 관련하여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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