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청장 선거쟁점 ②] 심판론·대세론 공방
거의 매년, 크고 작은 규모로 치러지는 ‘국가적 행사’인 선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무엇일까. “○○○을 심판하자” 또는 “승부는 이미 ○○○에게 기울었다” 따위가 아닐까. 보통 우리가 ‘심판론’, ‘대세론’이라고 칭하는 이 담론은, 대부분의 선거에서 핵심 쟁점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번 지방선거, 서울 구청장 선거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심판의 대상은 비단 이명박 대통령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나라당 소속 현직 구청장으로 재선·3선을 노리는 이호조(성동)·서찬교(성북)·이노근(노원)·문병권(중랑)·김재현(강서)·양대웅(구로) 후보 모두가 ‘구정 심판론’에 시달리고 있으며, 유일한 무소속 현직 구청장 추재엽 후보(양천) 또한 여야 후보들의 협공을 막아내느라 숨쉴 틈이 없다.
구정 심판론, ‘정권 심판론 비판’으로 맞불
가장 흥미로운 풍경이 연출되고 있는 곳은 전·현직 구청장이 맞붙은 성동이다. 민주당은 이호조 후보에 맞서 민선 1·2·3기 구청장(1995~2006)을 역임한 관록의 고재득 후보를 내세웠는데, 예의 서로가 서로에게 구정 심판론을 제기하는 양상이다.
이호조 후보는 “12년 전 성동구는 광진구와 비슷했는데 그간 발전이 정체돼 격차가 벌어졌다. 지난 4년 간 제가 한 일이 앞선 전임자의 11년보다 더 많았다고 구민들이 평가한다”며 고 후보 재임 시절에 대한 혹평을 쏟아내고 있다.
물론 고재득 후보는 이와 정반대의 주장을 펼친다. “지금 성동에는 재개발·재건축 등 할 일이 태산인데 뭔가 정체된 것 같은 느낌이다. 민심을 살피니 주민들의 불만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고 후보는 또 자신의 재임 기간 비판과 관련해서는 “구청장을 그만둔 게 얼마되지 않았다면 이해가 되겠지만 이미 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충분히 해결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하지 못한 것을 나에게 책임을 돌리다니 황당하다”고 외려 역공을 퍼붓는다.
3선을 노리는 한나라당 서찬교 후보와 참여정부 청와대 비서관 출신의 김영배 후보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성북에서는 ‘구정 심판론’을 ‘정권 심판론 비판’으로 잠재우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8년은 성북 지역경제의 침체기였다. 주민들의 소득은 점점 줄어들고, 아이들도 교육 문제로 피폐해지고 있다”는 김영배 후보의 공격에 대해, ‘정치인 구청장 불가론’으로 맞불을 놓고 있는 것이다. 서찬교 후보는 “구청장 선거는 지역의 살림살이를 하는 대표를 뽑는 일인데, 일부에서 정권 심판론과 연결해 선거를 하려고 한다”고 비판하면서 “중앙정치에 예속된 관념을 갖고 지방 일꾼을 재단하면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대문·동대문 ‘한나라당 구정 심판’ 한목소리
현직 구청장만 심판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서대문과 동대문은 현직 구청장 후보가 없음에도, ‘한나라당 구정 심판’을 외치는 야당 후보자들의 목소리가 드높다. 전임 한나라당 소속 구청장이 비리 사건에 연루돼 중도 사퇴하는 불명예를 안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한나라당에서는 구청장 퇴진 후 권한대행을 맡아 일했던 이해돈씨(서대문)와 방태원씨(동대문)가 나란히 출사표를 던졌다.
예의 경쟁자들은 문제의 비리 사건과 한나라당 후보들을 ‘엮는’ 데 주력하고 있다. 민주당 문석진 서대문구청장 후보는 “전 구청장과 함께 재직(서대문 부구청장)하는 동안 서대문구청의 비리와 매관·매직을 방지하는 데 왜 좀더 노력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며 이해돈 후보 ‘책임론’까지 제기한다.
민주당 유덕열 동대문구청장 후보는 방태원 후보의 ‘청렴성’을 문제 삼는다. “권한대행으로 일하다 곧바로 한나라당 후보가 되었는데, 이는 부구청장·권한대행 시절 주민이 아닌 개인의 영달을 위해 막강한 권한을 이용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이해돈·방태원 후보는 이에 ‘전문 행정관료’라는 점을 경쟁력으로 앞세워 심판론을 정면 돌파하고 있다. 서울시 행정관리국장·대변인 등을 지낸 방태원 후보는 유덕열 후보(민선 2기 동대문구청장)를 겨냥해 “민선 4기 15년 동안 정치인 출신들로만 구청장이 선출된 곳은 동대문밖에 없다. 서울시 국장 출신 행정 전문가가 낙후된 동대문 발전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공직생활 35년 경력의 이해돈 후보도 “행정엔 연습이 없으며, 자치단체장은 그 권한과 책임이 큰 만큼 경험 축적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미 난 서대문에서 능력과 청렴성을 인정받았다. 서대문의 현안과 주민들의 바람이 무엇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면서 행정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문석진 후보와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신뢰할 수 없는 여론조사 결과 난무
무소속 현직 구청장이 출마한 양천구는 심판론도 심판론이지만, 후보자들 간의 치열한 ‘대세론’ 공방이 더욱 눈길을 끄는 곳이다. “일 잘하는 구청장, 으뜸 구청장”을 내세우며 3선을 노리는 추재엽 후보 측은 한나라당 권택상·민주당 이제학 후보로부터 ‘꼴찌 구청장’ ‘무능력 구청장’이라는 혹평을 듣고 있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적지 않은 격차로 앞서 가는 등 승패에는 별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친다.
하지만 여야 후보들의 주장은 전혀 다르다. 이들은 각각 다른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하며 “오차범위 내 접전이거나 근소한 차로 앞서고 있다”(권택상) “이제학 대 권택상, 또는 이제학 대 추재엽의 대결로 좁혀졌다”(이제학)고 말한다.
세 후보자들이 제시하는 여론조사 결과에는, 언론 등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기관의 조사도 있지만 소속 정당 또는 선본 자체 조사도 포함되어 있어 신뢰성에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20% 이상 격차가 나는 조사부터 오차범위 내 접전이라는 조사까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조사가 난무한다. 비단 양천뿐만이 아니다. 은평·노원 등 각 후보자 측이 내놓는 보도자료나 홍보 내용을 보면 각자에 유리한 조사 결과만 으레 소개되고 있다.
한 선거운동본부 관계자는 이렇게 대세론 공방이 치열한 이유에 대해 “자신이 ‘될 후보’ ‘강한 후보’라는 인식을 유권자에 심어주고, ‘나냐 아니냐’는 구도를 만드는 게 선거의 기본이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격차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이탈자가 늘어나는 등 표 결집은 더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탓이다.
그는 또 “각 후보자들이 내놓는 여론조사 결과는 대부분 믿을 게 못된다”고 못박았다. “조사 샘플 조작, 유도 질문 등 원하는 대답을 얻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투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는 며칠 뒤면 판가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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