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대부 묘제 ①
조선시대 사대부 묘제 ①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2.11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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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둘러보기’ 33]
▲ 17세기 사천 목씨 충정공 목서흠 묘역. (도봉구 방학동). [나각순 제공]

조선시대 한양도성 안에는 왕릉을 비롯한 어느 무덤도 조성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한양도성 10리 밖의 양주·고양·광주·시흥·양천 등 한양 교외의 경기 일원은 왕실과 사대부들의 사패지와 농장이 많이 분포되어, 능·원을 비롯한 많은 수의 사대부 묘역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1963년 이후 서울시 관할구역이 확장되면서 서울 외곽 경기지역의 많은 지역이 서울에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현재의 서울지역에는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을 비롯한 내시·상궁들의 묘역과 해방 이후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묘역, 외국인 묘역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묘역이 자리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묘는 능·원에 해당하지 않는 왕족과 사대부 및 서인의 무덤을 일컫는다.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면 통과의례에 의해 상장례를 통하여 무덤에 묻히게 된다.

특히 혼을 모시고 제례를 올리는 사당의 설립과 아울러 체백을 모시는 무덤과 관련된 묘제는 법제적인 제도와 양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더욱이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로서 신분에 따라 묘의 명칭과 규모, 조성방법과 각종 석물의 배치에 따른 제한 규정 및 형태와 수량 등 외형적 요소의 차등이 있었으며, 무덤 안의 구조와 양식에 대해서도 일정한 규정이 적용되었다.

먼저 조선시대 사대부의 장례기간은 품계에 따라 정해졌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 상장조(喪葬條)에 의하면 “4품 이상은 3월장, 5품 이하는 유월장(踰月葬)을 시행하고, 가난하여 기한이 지나도록 장례를 치루지 못하면 예조에서 장례 비품을 지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신분의 위계질서가 장례기간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미 《예기》에는 “천자는 7월장, 제후는 5월장, 대부는 3월장”이라 하였고,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여기서 3월장은 세상을 떠난 달을 포함 세 번째 달에 길일을 택하여 장례를 치르는 경우를 말하며, 사망 후 짧게는 30일 길게는 80여일이 장례기간이 된다.

그런데 헌종 10년(1844)에 편찬된 《사례편람(四禮便覽)》에 보면 “옛날에 대부는 3월장, 선비는 유월장을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모두 3월장으로 한다”고 하여 신분에 따라 장례기간을 제한한 규정이 조선 후기에 들어 잘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종 2년(1865)에 편찬된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보면 “가난하여 기한이 지나도록 장사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에 서울은 호조·진휼청에서, 지방은 관찰사가 장례 용품과 비용을 제공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장례는 조선사회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규범의 하나로 매우 중요시 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는 규정을 마련하였다. 즉, 관인이 세상을 떠나면 조정에서 예장(禮葬)·증시(贈諡)·치부(致賻) 등의 방법으로 부조(扶助)하였다.

태종 5년(1405)에 종1품 이상은 예장과 증시하고, 정2품은 증시와 치부하고, 종2품은 치부만 하고, 공신의 장시(葬諡)는 종래대로 하게 하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묘제에 대한 법제화가 이루어졌고, 일반적으로 이를 바탕으로 실행되었다. 먼저 태종 6년에 대신의 예장에 석실(石室)을 쓰지 못하게 하고 회격묘(灰隔墓)를 조성하게 하였지만, 세종 때 《오례의(五禮儀)》 편찬이 시작되면서도 회격묘 조성을 정책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이렇게 조선시대 묘제는 점차적으로 일정한 양식으로 정착되어갔다. 신도비의 경우 현직과 증직을 포함하여 관직과 품계가 종2품 이상에 세울 수 있었고, 서인(庶人)의 묘비는 2척으로 제한하였다.

이렇게 석비를 비롯한 각종 묘역의 규모와 석물 등에 대해 품계에 따른 차등을 두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신분에 따른 분묘의 규모에 대하여 《경국대전》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분묘는 경내의 구역을 한정하여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금하는데, 그 한정된 규모는 종친이면 1품은 사방 각 100보, 2품은 90보, 3품은 80보, 4품은 70보, 5품은 60보, 6품은 50보로 한정한다.

문무관은 차례로 10보씩 감하고(1품은 90보, 6품은 40보), 7품 이하 생원·진사·유음·자제는 6품과 같고, 여자는 남편의 관직에 따른다. 농사가 장사지내기 전부터 지어졌으면 금하지 못한다. (경국대전 권3 예전 상장조)

위 《경국대전》의 내용에서 보듯이, 조선시대는 품계에 따라 묘역의 규모를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경국대전》에는 “서울에서 10리 이내와 인가의 100보 내에는 매장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여기에 조선 후기 영조 22년(1746)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는 “서울 10리 이내에 매장하는 자는 도원릉수목율(盜園陵樹木律, 능원의 나무를 훼손한 죄목)에 의하여 논죄한다. 그리고 기한을 강제로 정하여 발굴 이장하게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상장에 관한 규범이 형벌을 다루는 금제 사항으로 변하여, 묘역 설치의 범위를 강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장례의 금제는 오늘날에 전국의 국토가 묘역으로 덮이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화장火葬과 수목장(樹木葬) 등을 권하여 묘역을 줄이고자 하는 시대상황의 인식으로 나타나는 것과 견주어 볼 수 있는 형상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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