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대부 묘제 ②
조선시대 사대부 묘제 ②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2.18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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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둘러보기’ 33]

고려시대에는 혈(穴)을 공유하지 않는 단독장(單獨葬)을 묘제의 원칙으로 삼았던 반면, 조선시대에는 부부의 합장을 마땅히 여겨 성리학적 예(禮)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풍수지리설의 음양론에 의거 망자인 남편을 기준으로 좌측을 중요한 자리로 여겨, 원배(元配, 본 부인)를 부좌(祔左)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매장보다는 화장을 권장하였다. 그리고 일반 산지보다 공동묘지 이용을 권장하고, 매장의 신고제를 허가제로 바꾸어 식민정책의 강도를 높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조선인들은 전통적인 유교적·생활문화적 정서에 어긋나는 반민족문화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아울러 화장은 일본인들의 문화로 인식하여 이를 기피하였다.

공동묘지 또한 풍수사상으로 볼 때 혈(穴)을 공유하는 것으로 기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강제인 법령 집행으로 공동묘지가 점차 확대되어 갔다.

급기야 오늘날에 와서는 묘지의 공간적 한계를 느끼고 무덤 면적을 최소화하고 지방자치단체별 화장장의 운영이나 공원화된 묘역 마련 등 묘제 개혁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16세기 초 정국공신 류순정 묘역. 구로구 오류동. [나각순 제공]

한편 조선시대 묘제에는 시대의 흐름 따라 성리학·풍수지리설·음양론·불교 등 다양한 사상적 문화요소가 수용되고 융합되어 나타난다.

즉 시대상황에 따라 당대의 종교관·사생관·미래관 등 정신적인 가치관과 일상의 사회생활 질서 등을 반영하고 있어, 당대의 사회구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먼저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의 영향이 매우 크다. 불교가 성행했던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선종 선사들의 부도 앞에 탑비가 세워지는 것이나 일반 관인들의 묘역에는 지석이 매장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사대부의 묘역에는 묘비가 일반적인 형태로 세워지게 된다. 이는 피장자의 자손이나 문인들이 《주자가례》에 의한 성리학의 윤리적 가치관에 따라 조상 숭배를 일정한 격식에 따른 묘비를 건립하고, 이 묘비에 조상의 덕을 밝히고 드높이는 것으로 예를 실행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중인과 서인에 이르기까지 묘비를 세우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또 회격묘(灰隔墓)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착되어 갔으며, 부부 합장묘가 일반화 되어갔다.

한편 조선시대 묘제에는 풍수지리와 음양론이 철저하게 구현되었다. 풍수지리에 따른 묘제의 본질은 생기론(生氣論)과 감응론(感應論)이다.

생기론은 우주의 조화력을 가진 생기가 인생만물의 운명을 지배하는데, 생기가 충만한 땅에 묘역을 정하면 좋은 생기를 받을 수 있다는 논리이다. 또한 감응론은 부모의 유골이 땅속의 생기를 받으면, 자손에게 감응이 생겨 생기의 효과가 있어 자손들이 발복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상의 발복과 자손의 번영을 연계하여 조선시대 최고의 덕목인 효를 강조하다. 이것이 유교의 정치이념으로 작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당대의 사회적 질서체제 유지에 기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석물의 배치와 합장에서 보이는 방위 개념은 음양론(陰陽論)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죽은 자의 공간은 서쪽과 오른쪽을 우선으로 하여 남편이 오른 쪽 부인이 왼쪽에 묻히는 부좌(祔左)가 일반적인 형태이다. 반면 살아 있는 자의 공간은 동쪽과 왼쪽을 양의 개념으로 하여 석물을 배치하게 된다.

이는 조선시대 묘역을 이해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며 중요한 사항이 된다. 또 2인 이상을 합장할 경우도 자손을 생산한 비중이나 묘역이 마련된 시간의 격차에 따라 부좌의 중요함을 지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왼쪽이 아닌 오른쪽에 합장한 경우도 나타난다.

한편 풍수지리적 입장에서의 묘지 조성을 “조상의 유골을 매장하여 자손의 부귀를 희구하는 것으로 풍수의 미신사상은 쇠망의 원인이 된다”고 보기도 하였다. (이능화, 《풍수사상연구》 1930).

즉 《조선왕조실록》, 서거정의 《필원잡기》, 정약용의 《경세유표》 등 여러 문헌에 보이는 풍수사상에 의한 묘지 조성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풍수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의 《조선의 풍수》에서는 “묘지풍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오랜 역사를 일관해서 조선이 혈족중심사회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식민사학의 관점에서 조선 사회가 사회적으로 성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일종의 정체성(停滯性) 이론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음택풍수(陰宅風水)를 미신적 현상으로 보지 말고, 자연지리적 요소와 묘역 조성의 방법론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풍수지리적 관점 자체로 묘역이 조성되었으며, 이것은 그 시대적 인식의 반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에 의해 불교가 탄압을 받았으나, 역사의 흐름에 따라 잉태된 문화 양식은 어느 한 순간에 불식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조선시대 전기에 불교의 영향으로 지속적으로 묘제에 나타난 것으로 동자석과 망주석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상장례에 있어서도 조선 초기에는 유교적 의례가 사대부 층에서도 잘 이행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무속과 불교의 요소가 혼합된 형태로 시행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묘제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우리 장례문화의 복합적인 요소가 발전적으로 변해온 것으로 이해된다.

아울러 조선시대 묘제는 여러 문화적 요소의 융합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었지만, 현실적인 경제적 요인과 정치흐름의 변화가 실질적인 묘제 변화의 큰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현대에 조성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묘역 및 국립현충원 등에 모셔져 있는 묘제의 일반적인 모습 또한 조선시대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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