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자를 막거나 울타리용으로 심었던 탱자나무
침입자를 막거나 울타리용으로 심었던 탱자나무
  • 송홍선 민속식물연구소장
  • 승인 2011.02.14 1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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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홍선의 ‘풀꽃나무 타령’ 75]
▲ 탱자나무. [송홍선]

탱자나무와 관련해 잘 알려진 고사 성어는 귤화위지(橘化爲枳)가 있다.

남귤북지(南橘北枳)와 같은 의미로 쓰는 고사 성어이다. 중국 회수(淮水)의 남쪽인 회남(淮南)의 귤나무를 회수의 북쪽인 회북(淮北)에 옮겨 심으면 탱자나무로 바뀐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처지가 달라짐에 따라 사람의 기질도 변한다는 뜻이다.

춘추시대 제(齊)나라에 안영이라는 재상이 있었다. 어느 해 안영이 사신으로 초(楚)나라에 가게 됐다. 평소에 안영이 비상한 인물이라는 소문을 듣고 있던 초나라 영왕은 이 기회에 그를 시험해 볼 욕심이 생겼다. 마침 포리(捕吏)가 죄수를 끌고 지나갔다. 영왕이 “그 죄수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포리는 “제나라 사람인데 절도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포리의 대답을 듣고 난 후, 초왕이 안영에게 “제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안영은 “회남의 귤을 회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어버립니다. 제나라 사람은 도둑질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라는데 초나라에 와서 도둑질한 것을 보면 초나라 풍토 때문인 것 같습니다.”라고 응수했다. 영왕은 안영의 대답에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반도에서는 탱자나무의 울타리와 관련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전한다. 옛날에 울타리용으로 많이 심었는데, ‘탱자나무 울타리는 귀신도 뚫지 못한다.’라는 말은 침입에 대한 방어용 구조물로 최고임을 뜻한다.

▲ 탱자나무. [송홍선]

탱자나무는 줄기에 가시가 강하게 나 있어 울타리로 널리 심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서도 최 참판 댁의 사랑 뒤뜰에 둘러친 것은 야트막한 탱자나무 울타리라고 했다. 충남 서산의 사적 11호인 해미읍성은 성벽 둘레에 깊은 도랑을 파고 탱자나무를 심어서 적의 접근을 막았단다.

강화도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심은 탱자나무의 일부가 지금도 남아있다. 고려 고종은 몽골족의 침입이 있었을 때 이를 피하기 위하여 28년간이나 강화도에서 정무를 살폈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의 가족이 강화도에서 청나라의 침입을 피했다. 강화도는 이런 저런 전란을 계기로 성을 튼튼히 하기 위해 성 밑에 탱자나무를 심어 적군이 손쉽게 덤비지 못하도록 했다.
 
강화도에는 지금 성이 무너져 자취만 남았으나 심었던 탱자나무는 방어의 유물로 남아 있다. 옛날 탱자나무를 심기 시작할 때는 조정에서 종자를 강화도로 보낸 다음 그 생육상태를 철저히 보고하도록 했단다.

강화도의 갑곶리에는 천연기념물 제78호의 노거수 탱자나무가 있다. 이 나무의 크기는 폭 4m, 가슴높이 지름 14m이다. 강화도의 사기리에도 천연기념물 제79호의 탱자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높이 3.8m이며 지상 28cm 높이에서 3개로 갈라진 다음 다시 각각 여러 개로 갈라져서 퍼졌다. 경기도 포천의 왕방산 산중턱 목장에 울타리로 심어놓은 탱자나무는 세계에서 가장 추운 곳에서 자라는 나무로 판단된다. 경기도와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한반도에서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기도 하다.

한방과 민간에서는 소화기관의 기능을 원활히 하는 성질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위장의 팽만감이나 무력증, 소화불량에서 변비, 탈항 등의 증세에 탱자나무 열매를 달여 하루에 2~3번 마셨다. 그리고 두드러기 나는 데에도 탱자나무 열매의 즙을 바르고 달여서 그 물을 마셨다.

탱자나무 줄기는 북채를 만들 때에 쓴다. 제주도에서는 탱자나무가 감귤의 대목으로 쓰여 접붙이기가 시작되는 봄이 되면 기술자들은 접붙이기 품삯으로 많은 소득을 올리기도 했다. 탱자나무의 꽃말은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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