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사지 십층석탑(敬天寺址十層石塔) ①
경천사지 십층석탑(敬天寺址十層石塔) ①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3.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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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 34]

▲ 경복궁 경내에 있을 때의 경천사지 십층석탑. [문화재청 제공]
경천사지 십층석탑(敬天寺址十層石塔)은 한동안 종로구 세종로1가 경복궁 경내에 위치해 있다가, 풍화작용과 산성비에 의해 심각한 손상이 진행되자 1995년 해체 해체 보수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을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광장 뒤편에 한국 문화재이자 서울 문화재에 상징성을 띠며 자리하게 되었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고려 후기 충목왕 14년(1348)에 조성된 대리석 석탑으로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약 13.5m로 3층의 기단부에 10층의 탑신부와 상륜부를 갖추고 있는데, 모두 142개 부재로 이루어졌다.

이는 기존의 신라계 석탑과는 양식을 달리하는 특수형의 석탑이다. 이 탑은 조선 초기의 국보 제2호 원각사지 십층석탑 모양으로 이어지는데, 하늘을 향해 날렵하게 솟아오른 세련된 탑신과 옥개석의 상승미를 자랑하며, 기단부의 다양하고 화려한 불상 조각이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즉 고려시대의 석탑은 신라시대의 석탑의 양식을 이어 받아 평면 사각형의 석탑 또는 새로운 형식으로 다각다층석탑이 유행하였는데, 이런 것과도 다른 특수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원래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련리(개풍군 광수리, 현재 개성시 扶蘇山 기슭)의 경천사지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이 석탑의 기구한 운명을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면서 시작되었다.

1907년 한국을 방문한 일제의 궁내성 대신 다나카 미츠야키(田中光顯)가 이 탑을 탐내었다. 이어 1909년 한국에 대사로 온 다나카는 “고종황제가 경천사탑을 자기에게 하사하였다”는 터구니 없는 거짓말로 사람을 속인 후 일본 도쿄에 있는 자기 집으로 불법 반출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일본에서 격렬한 비난이 일어나자, 그는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인 1918년에 한국에 반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탑은 많이 훼손되었으며 제자리로 가지 못하고 해체된 상태로 거의 40년 동안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었다.

1959년에 문화재 전문가들에 의해 이 탑의 존재가 확인되어 재건에 착수하였다. 1년간의 작업 끝에 1960년 탑을 복원해 경복궁 경내에 전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훼손된 부위를 시멘트콘크리트로 메우는 형태로 부실하게 복원되었다.

그런데 1995년에 들어 더 큰 훼손이 진행될 것으로 판단되어 142개 부재를 해체 보수하기에 이르렀다. 대전에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 대리석 부재를 경화(硬化) 처리하고, 금이 간곳을 에폭시 수지 접착제로 붙여 정비하였다.

이때 1960년 재건 때 사용된 시멘트를 제거하고 레이저를 이용하여 표면을 청소하였다. 또 석탑 부재 142개 가운데 크게 손상된 64개 부재를 교체하였는데, 이때 암질(巖質)이 유사한 강원도 정선에서 산출된 대리석을 이용하였으며, 문양과 형태를 원래 모습대로 살렸다.

이 탑의 보존 처리가 완성되면서 용산에 새로 건립된 국립중앙박물관에 건립하기로 하고, 야외에 세울 경우 풍화와 산성을 대비하여 실내에 전시하기로 하였다.

이에 2005년 4월부터 부재를 대전에 있던 문화재연구소에서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와 수직과 수평의 균형을 맞춰가며 조립하기 시작하여 개관을 앞둔 8월에 완공 전시하기에 이르렀다.

탑의 보수에는 한국자원연구소와 원자력연구소도 참여하였다. 이렇게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10년의 보수 처리를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의 1층 중앙광장에 위치함으로써 박물관의 상징 유물이 되기에 이르렀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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