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사지 십층석탑(敬天寺址十層石塔) ②
경천사지 십층석탑(敬天寺址十層石塔) ②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3.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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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 34]

▲ 경복궁 경내에 있을 때의 경천사지 십층석탑. [문화재청 제공]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개성 부소산 경천사에 건립되었다가 일본 도쿄를 거쳐 다시 환국하여 경복궁-대전-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유랑 100년의 대장정을 마치고 자기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이 탑의 조립에는 경력 15년에 달하는 전문 석공 3~4명이 5개월이 걸렸다. 거대한 크레인을 이용하여 부재를 올리고, 정교하게 조립하게 되는데 1개 층을 조립하는데 2~3일, 수평을 확인하기 위해 기다리는 기간이 10일 정도로 이때까지 1㎜의 오차도 없어야 만이 다음 층을 쌓았다고 한다.

탑을 조립할 때 바닥에 받침대를 놓아 안정을 기했다. 맨 아래에 철제 받침대를 만든 뒤 넓적한 화강암 판을 올려놓고 그 위에 탑의 기단부를 세우고 탑신과 상륜부를 조립해 나갔다.

탑의 무게는 100톤, 철제 받침대는 가로 6m 세로 6m 높이 65㎝이며, 이 받침대는 지진규모 8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다. 받침대 아래쪽은 바퀴를 설치하여 레일로 중앙광장 바닥에 연결되었다. 지진이 발생하였을 때 받침대가 레일 위를 움직여 충격을 흡수하도록 되어있다.

탑의 구성은 3층의 기단부(基壇部)와 10층의 탑신부(塔身部), 그리고 상륜부(相輪部)로 구성되어 있다. 재료는 전체가 회색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3층의 기단부는 그 평면이 사면돌출형으로 ‘亞(아)’자형을 이루고 있다. 각 층의 면석에는 부처와 보살·인물·초화(草花)·용 등이 조각되어 있으며, 각 모서리에는 원주형의 우주(隅柱)가 세워져 있다. 갑석(甲石)은 3층이 모두 같은 형식으로 상하에는 연화문을 새겨 넣었다. 단지 3층의 갑석만이 상단부에 난간을 돌리고 그 위에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전부 10층으로 1층~3층의 평면은 기단부와 같이 ‘亞’자형으로 사면돌출의 형태를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일반석탑과 같이 방형의 평면을 갖고 있다.

각층 몸돌의 각 모서리는 원주형으로 모각하였고, 각 면석에는 부처·보살·13회불(十三會佛)․천부(天部) 등을 빈틈없이 조각해 놓았다.

그리고 층마다 몸돌 밑에는 난간을 돌렸으며, 지붕돌 밑에는 다포집 양식의 두공(枓栱) 형태를 모각하고, 윗면의 낙수면 부분은 팔작지붕 형태의 모양으로 기왓골을 뚜렷이 표현하고 있다.

특히 삼층은 이중의 옥개(屋蓋)를 조성하고 있어 그 장식성으로 인해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이는 목조건축물의 방식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4층부터 10층까지는 체감이 없이 그대로 올라가고 있으나, 3층까지는 감축을 느낄 수 있다.

상륜부는 단순한 형식으로 평면은 원형이며, 노반(露盤)과 연주문형(蓮珠紋形)의 복발(覆鉢), 앙련으로 된 앙화(仰花)가 있고 그 위에 보탑형과 보주(寶珠)가 있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가늘고 길며, 4층부터 10층까지 체감이 없이 그대로 올라가고 있기 때문에 불안정해 보일 수 있으나, 3층의 ‘亞’자형의 기단부와 3층까지의 탑신부의 체감이 현저하기 때문에 오히려 경쾌하고 날렵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한편 제1층 몸돌 이맛돌에는 조탑명(造塔銘)이 새겨져 있어 건립연대와 조성배경에 관해 알 수 있다. 명문에 의하면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건립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지정8년 무자 3월(至正八年戊子三月日)에 대시주(大施主) 강융(姜融)과 원사(元使) 고용봉(高龍鳳), 대화주(大化主) 성공(省空), 시주(施主) 법산인(法山人) 육이(六怡) 등이 원나라의 황제와 고려왕실의 수복(壽福)을 기원하며 천기가 순조롭고 국태민안하며 불법이 더욱 빛나고 법륜이 항상 움직여 수복을 얻고 다 같이 불도를 이루기를 기원한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은 원(元)의 순제(順帝)가 집정하던 시기였는데, 순제의 제2황후가 바로 고려인 기자오(奇子敖)의 딸이었다. 그리고 그 소생이 순제의 후계자로 책봉되어 기씨는 기황후의 칭호를 받고 있었다.

중국의 정세가 이렇게 되자 고려에서는 기씨 일족과 친원세력의 권세가 왕권을 능가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송도에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경천사에 원의 번영과 고려왕실의 천수 만세를 기원하는 대리석탑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를 국교로 삼았던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특수형의 석탑으로 분류되고 있다. 즉 ‘亞’자형의 사면돌출형 평면과 다포식(多包式) 조영, 조각사적인 친연성(親緣性) 등이 그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울러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약 120년 후인 조선 초 세조 때 조성된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선구적인 모델이 되었다. 따라서 그 수법이나 양식적인 면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석탑에서 조선시대 석탑으로 이어지는 양식 변천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경천사(敬天寺, 擎天寺)는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예종 13년(1118)년에 숙종의 기신도량(忌辰道場)이 베풀어지고, 인종 12년(1134)에는 어머니 문경태후(文敬太后) 이씨의 추모제가 열렸다.

그리고 인종·의종·공민왕 등이 자주 행차한 왕실 사찰이었다. 또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태조는 1393년에 천추절(千秋節) 행사를 치루고, 1394년에는 환조(桓祖)의 추모제를 치렀으며, 1397년에는 신덕왕후 강씨의 추모제를 지내고 화엄법석을 여는 등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존속된 사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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