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항사(葛項寺) 삼층석탑 ②
갈항사(葛項寺) 삼층석탑 ②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3.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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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 35]
▲ 갈항사 삼층석탑(서탑). [나각순 제공]

상륜부는 노반석부터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다. 즉 서탑의 경우에는 3층의 옥개석부분마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므로 당연히 상륜부는 없으며, 동탑의 경우에는 노반부터 남아 있는 부재가 하나도 없다. 이는 이전할 때 예전의 자리에서 수습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한편 이 갈항사 삼층석탑의 특색은 탑신부 표면에 수많은 못구멍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옥신과 옥개석 처마 부분에 수십 개의 못구멍이 뚜렷이 보이며, 2층 옥개받침 구석부분에도 구멍의 자리가 발견된다.

이렇듯 많은 못구멍은 탑신 표면에 금동판으로써 장식한 것을 고정시키기 위한 꽂이용 추제(槌製) 모습이 아닌가 보고 있다.

추제는 금동판을 양각의 모형상에 대고 두들겨 그 상을 압출해 낸 것을 말하는데, 현재 두 탑 모두 1층 탑신의 각 면에 마모가 심해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무언가를 조각해 놓은 듯한 흔적이 보이고 있다.

따라서 초층 옥신에 못질을 하여 추제상을 장식하고 다른 부분에도 여러 상의 추제품을 덮어 장식하였던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그리고 그 1층의 상은 남아있는 형태나 일반적인 예를 통해 볼 때, 아마 사천왕상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아울러 동탑의 경우에는 상층 기단부 면석의 오른쪽 우주와 탱주 사이에 명문이 이두문(吏讀文)으로 음각되어 있어 탑의 조성유래와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명문에 따르면 천보(天寶) 17년(758)에 영묘사(靈妙寺) 언적법사(言寂法師)라 불리는 오라비와 조문황태후군(照文皇太后君)과 경신태왕(敬信太王)이라 불리는 자매에 의해 이 탑이 조성되어졌다고 전해진다.

천보 17년은 중국 연호로 신라 경덕왕 17년(758)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명문은 신라의 금석학․서지학․이두문을 중심으로 한 어문학 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3남매가 석탑을 세우고 그 일을 석탑 기단에 새겨 넣은 것으로 본문에는 천보 17년에 세웠다고 하지만 실제 석탑기는 원성왕(元聖王) 재위 기간(785~799)에 세웠다고 추정된다.

즉 큰 누이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는 원성왕의 어머니로서 아들이 즉위한 이후 책봉된 이름이며, 작은 누이 이름에 보이는 경신(敬信)은 김경신(金敬信)이니 원성왕 이름이다.

갈항사지 삼층석탑은 석탑의 일반양식을 잘 계승하면서 신라의 석탑으로 명문이 적혀져 있는 유일한 예이기에 그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이 명문은 성균관대박물관에 탁본으로 소장되어있다.

한편 갈항사는 경북 김천시 금오산(金烏山) 서쪽에 있던 절로, 고문헌을 보면 조선 중기까지 이름이 남아있다. 갈항사는 신라의 승려 승전(勝詮)이 효소왕 1년(692)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창건하고 경전을 주석하면서 화엄을 강의하던 사찰이었다.

《삼국유사》 권4, 의해5, 승전촉루에 의하면 “신라 승려 가귀가… 이에 심원장을 편찬하였다. 그 대략을 이르면 승전 법사가 돌무리를 모아 놓고 (≪화엄경(華嚴經)≫을) 강의하였는데, 지금의 갈항사에서였다. 그 돌무리 80여 개가 주지에게 전하는데, 자못 영험과 이적을 보였다(新羅沙門可歸…乃撰心源章 其略云 勝詮法師領石徒衆 論議講演 今葛項寺也 其髑髏八十餘枚 至今爲綱司所傳 頗有靈異)”고 한다.

또 《조선금석총람》 상권 갈항사석탑기에 석탑 2기 가운데 동탑에 음각 이두문으로 된 명기(銘記)된 내용이 실려 있다.

▲ 갈항사 삼층석탑(동탑). [나각순 제공]
즉 두 탑을 세운 내용으로, 바로 위에서 언급한 “두 탑은 천보 17년 무술 중에 세워졌는데, 남매 3인이 그 일을 이루었다. 오빠는 영묘사 언적 법사이고, 큰 누이는 조문황태후이고, 작은 누이는 경신태왕이다(二塔 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 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 娚者 零妙寺言寂法師在旀 姉者 照文皇太后君妳在旀 妹者 敬信太王妳在也).”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군니’는 ‘언니’의 뜻으로 ‘니’는 ‘어머니’의 뜻으로 각각 풀이된다고 한다.

이러한 동탑의 4줄 짜리 금석문 내용은 1914년에 알려졌는데, 이후 도굴되어 탑 안 유물이 도난당하고, 1916년 석탑도괴 사건이 벌어지자 그것을 핑계로 탑들은 총독부 박물관이 있는 경복궁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특히 석탑을 해체할 때 두 탑의 기단부 아래에서 모두 사리구가 출토되어 주목된다. 이렇게 기단부 아래에서 사리구가 출토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며, 사리구들은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으로 이관되어 진열·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갈항사터에는 석탑의 원 위치를 알리는 표석이 있으며, 주위는 온통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이곳에는 갈항사지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절터 가장자리에 마련된 전각 안에 그대로 전하는데, 국보 제245호 ‘오봉동 석조석가여래좌상’으로 지정되어 있다.

석불과 대좌는 여러군데 깨져 있고, 왼팔은 시멘트로 붙여놓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또 갈항사지 쇠창살 안에 석조비로자나불이 오셔져 있다. 이 불상은 목 아래쪽은 본 모습인데, 머리는 근래의 것을 얹혀놓았다.

이러한 실정의 갈항사 터는 학술발굴과 더불어 국가사적지 내지는 지정문화재로 지정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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