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계원(南溪院) 칠층석탑
남계원(南溪院) 칠층석탑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4.01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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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 36]

▲ 남계원 칠층석탑(1). [나각순 제공]
남계원(南溪院) 칠층석탑은 한동안 종로구 세종로1가 경복궁 경내에 위치해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을 용산구 용산동6가 168-6번지로 이전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 남쪽 외곽에 옮겨져 자리하고 있다. 이 석탑은 웅장한 기풍과 정제된 결구수법을 보이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남계원 칠층석탑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소재지는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덕암리로 지금의 경기도 개성시(開城市) 덕암동(德岩洞) 남계원(南溪院) 절터에 있었던 것이다.

1915년 기단부(基壇部)를 제외한 탑신부(塔身部)만 경복궁 내로 옮겨졌다. 1990년 원형대로 복원되면서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으로 다시 이전하였다. 이어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되면서 다시 현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한편, 경복궁으로 이전한 뒤 원위치를 재조사한 결과, 지하에서 이중으로 구성된 기단부의 잔석이 발견되어 추가로 이전하여 탑신부 옆에 따로 놓이게 되었다.

즉 이 석탑이 처음 경복궁으로 옮겨왔을 때는 기단부가 없이 탑신부 위쪽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사진을 보면 기단부는 그 높이까지 완전히 매몰되어 주변 일대가 완전 평지를 이루고 있어서 기단부의 존재를 지나치기 쉽게 되어있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기단부 없이 지상에 노출된 탑신부 윗부분만 옮겨왔던 것이다.

남계원칠층석탑은 2층의 기단위에 7층의 탑신을 가진 고려시대의 일반형 석탑으로 높이는 7.54m, 재료는 화강암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신라 석탑의 전형을 지키고 있는 듯이 보이나, 세부적으로 양식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여러 개의 부재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 몇 개가 결실되었으나 하층기단 면석은 신라시대보다 훨씬 높아진 반면, 상층기단은 상대적으로 낮아진 듯 보인다. 기단부는 탑신부에 비해 훼손됨이 심하다.

상·하층 갑석은 전체가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은 까닭에 현재는 하층기단 면석과 상층기단 사이의 하층기단 갑석 자리에 상·하층 기단 갑석(甲石)을 함께 놓았는데 상층기단의 갑석은 세련된 모습이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屋蓋石)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였다. 각 층 옥신에는 모두 양쪽에 우주가 모각되어 있는데, 각출 정도가 심하지 않아 신라시대보다 많이 퇴화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7층의 옥신 중 1층 옥신의 북쪽 한 면에만 문의 형태와 같은 모습이 모각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양 우주(隅柱) 사이에 두 겹의 사각의 테두리가 새겨져 있다.

옥개석은 각 층이 모두 동일한 수법을 보이고 있는데, 옥개받침은 모두 3단씩 낮게 조성되어 있고, 윗면에는 아무런 굄대도 없이 바로 그 위층의 옥신을 받치고 있다.

지붕의 낙수면은 완만한 기울기를 유지하고 있으나, 아랫면의 받침부가 낮아서 중후한 느낌을 주고 있다. 추녀가 두꺼워지고 지붕선이 만나는 전각부(轉角部)에 이르러서는 윗면에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다가 반전(反轉)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랫면도 이에 따라 반전되어 통일신라시대에서는 볼 수 없는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경쾌한 느낌을 주는 일반형 석탑과는 달리 추녀가 두꺼워져서 무거운 느낌을 주지만, 전각부에 이르러 상하 모두 반전되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 무거운 느낌을 반감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상륜부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만이 남아 있는데, 노반은 탑신 정상에 한 개의 돌로 조성되어 있다. 그 위에 있어야 할 부재는 현존하지 않는 상태이다.

▲ 남계원 칠층석탑(2). [나각순 제공]
한편 1915년 경복궁 내로 이전할 때 탑신부에서 7축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紺紙銀泥妙法蓮華經)》이 발견되어 이 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은 고려 제25대 충렬왕(忠烈王) 때 사경(寫經)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충렬왕 9년(1283)에 탑을 중수하면서 사리공(舍利孔)을 만들어 넣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이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따라서 이 남계원칠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일반형 석탑을 잘 계승한 것처럼 보이지만, 퇴화된 우주의 모각(模刻)이나 두꺼운 추녀, 지붕 낙수면 전각부의 상하의 반전 등 세부적인 면에서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는 고려 중기 때 세워진 석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전체적으로 보아 2층 이상 탑신부 각층의 감축률은 낮은 편인데, 웅건한 기풍과 정제된 결구수법을 보여서 고려시대 석탑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각 부분의 수법과 양식이 상하 모두 일치하지 않는 점에서, 후세에 보수된 탑이 아닌가하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원래 탑이 있던 경기도 개성시 덕암동이라는 곳이 과거에는 개국사(開國寺) 터로 알려져 탑의 이름도 개국사탑 또는 봉경탑(奉經塔)으로 불러왔으나, 오늘날에는 개국사 터는 다른 곳에 있고 이곳은 남계원 터로 밝혀져 탑의 이름도 현재의 이름과 같이 다시 고쳐지게 되었다.

즉 고유섭(高裕燮)의 《조선탑파의 연구》에 실린 <소위 개국사탑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하여 1938년에 본래의 이름을 밝혀졌다.

이 탑은 1915년 소위 일제에 의해 그들의 치적을 찬양하여 식민통치의 효용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경복궁의 전각을 훼철하고 서울 근교의 불상·석탑·부도·부도탑비 등을 옮겨와 행사장의 조경물로 삼으면서 원래의 위치를 이탈하였던 것이다.

이때 경복궁 안에 건립한 총독부미술관 앞 잔디광장에 안흥사오층석탑을 세우고, 그 오른쪽으로 서너 그루의 나무를 지나 만들어진 다른 잔디정원 가운데 보제존자사리탑 2기 사이에 남계원칠층석탑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때 남계원칠층석탑은 개성의 봉경탑이라고 표시하였다. 한편 남계원이라는 명칭도 잠정적인 의미가 있는데, 고유섭은 이 남계원탑을 ‘관음사탑’이라고 하는 것이 바른 이름일지 모른다고 하였던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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