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은 여전하나 ‘그 옛맛’은 아닌 해장국
맛은 여전하나 ‘그 옛맛’은 아닌 해장국
  • 황교익 / 맛칼럼니스트
  • 승인 2010.06.1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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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익의 ‘서울음식 먹어본 지 30년’ 9]
강남이 본격 개발되기 전, 그러니까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의 중심은 종로였다. 조선시대 때부터 그랬다. 그래서 서울 음식문화도 종로가 주도하였다. 특히 종로1가의 피맛길과 청진동 일대는 서울 서민 음식의 ‘메카’였다. 선지해장국과 빈대떡, 생선구이백반, 냉면 등등이 있었다.

최근에 이 지역이 급속도로 재개발되면서 서울 음식의 지형도가 달라졌다. 일부는 사라지고 일부는 새 건물로 옮겼다. 또 그 새 건물에는 최근 유행하는 온갖 프랜차이즈 업소들이 주요 자리를 차지하였다. 서울의 긴 역사를 생각하면 ‘듣보잡’들이 서울 토박이들을 몰아낸 것이다.

해장국에 담긴 ‘필부들의 역사’

▲ 종로구 청진옥의 해장국. ⓒ황교익
청진동 골목에 오랜 해장국집이 있었다. 청진옥이다. ‘청진동 해장국’이라는 한국 해장국의 대명사를 탄생시킨 음식점이다. 1937년에 개업을 했다. 나는 이 청진동에서 10여 년간 밥벌이를 하여 이 해장국을 물리도록 먹었다. 해장국을 먹으며 2대인가 3대째의 주인 양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왜 이 동네에 해장국집이 많은 거지요?
“여기가 조선시대 때부터 나뭇꾼들이 쉬는 곳이었잖아. 무악재 너머에서 밤새 나무를 짊어지고 여기 도착을 하면 아침이거든. 여기서 국밥 한 그릇 먹었던 것이지.”

-일제시대 때도 그랬나요?
“장꾼들이 많았다고 해.”

일제시대 때의 종로 한복판 사진들을 보면 과연 지게에 나뭇짐을 올린 남자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들이 이 해장국을 먹었다는 말에 역사란 이렇게 필부들의 음식에도 연연히 흐르는가 싶어 가슴이 쯔르르하였었다.

또, 이 식당에 들어가면 벽면에 노래하는 조영남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사진의 배경은 청진옥 실내. 1980년대의 일이었던 것 같다. 가수들이 호텔에서 디너 콘서트를 하는 것을 비꼬아 조영남이 해장국집에서 조찬 콘서트를 연 것이다. 나는 이 콘서트를 보지 못한 것이 내내 서운하였다. 새벽에 주당들이 해장국에 막걸리 마시며 “돌고 도는 인생~”을 부르는 맛이 죽였을 것이다.

내가 본 청진옥은 아침과 밤의 구별이 없었다. 새벽부터 해장을 하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한밤중에도 2차, 3차에 이은 해장꾼들로 가득 찼다. 청진동에서의 이런 풍속도는 오래된 것이었다. 일제시대 때부터 청진동 인근에 언론사와 출판사 등이 많아 기자와 문인들의 잦은 술자리에 이 청진옥이 꼭 끼어들었다. 분위기가 이러니 나이 지긋한 손님이 많았다. 그들의 식탁 위에는 막걸리와 해장국이 항상 같이 놓여 있었다. 나도 그렇게 마시고 먹었다.

청진동 골목에서 ‘르메이에르 빌딩’으로

▲ 근처 르메이에르 빌딩 1층으로 자리를 옮긴 청진옥. ⓒ황교익

그러던 것이, 청진동 골목에서 이 해장국집이 사라졌다. 2008년이었다. 청진동 재개발 사업으로 청진옥이 종로 큰길의 큰 건물(르메이에르인가 하는 그 요상한 이름의 건물) 1층 자리로 옮겼다. 오랜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 나무로 인테리어를 했는데 오히려 역사 짧은 프랜차이즈 업체가 겉멋만 낸 듯하여 어색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옛정에 가끔 들러 해장국을 한 그릇씩 하는데, 입으로 닿는 맛은 여전하지만 내 몸으로 느끼는 것은 그 옛 맛이 아니다. 어쩌겠는가. 서울은 항상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청진동 해장국은 첫술에는 슴슴하다는 느낌이 든다. 입에 착 달라붙는 맛은 아니다. 맑은 고기국물에 선지와 내장, 배추우거지, 콩나물이 들어가 있다. 배추우거지가 들어 달콤한 듯 시원한 맛이 있다. 3분의 1 정도 먹고 나서야 이 해장국의 진미를 발견하게 되는데, 입에서의 느낌이 아니라 속에서의 느낌에 의한 것이다. 속이 편안해지면서 따스해진다. 해장국은 술로 지친 속을 다스리는 게 그 첫째 목적이므로 청진동 해장국은 그 정체성을 정확히 지키고 있는 셈이다.

‘디자인 서울’인가 뭔가 하여 서울 한복판의 때깔이 요상하게 바뀌고 있다. 첫눈에 그게 멋지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책상에서 찍찍 그어댄 페이퍼 위에서의 디자인이란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해장국 한 그릇 먹고 속들 차렸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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