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잠단지(先蠶壇址) ①
선잠단지(先蠶壇址) ①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4.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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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 37]
▲ 선잠단지-성북동. [나각순 제공]

선잠단지는 잠신(蠶神) 서릉씨(西陵氏) 누조(嫘祖)에게 양잠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례를 올리던 곳으로, 성북구 성북동 64-1번지에 위치해 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83호로 지정되었으며, 같은 해 9월에 철책을 세우고 단장을 하였다. 지금은 서울시 소유의 1, 745㎡(약 461평) 규모의 석조기단 조형물로 정비되어 있다.

지형상으로 보아 현재의 선잠단지와 성북초등학교를 나누는 선잠단지길이 이어진 언덕일대를 포함하여 그 좌우에 흐르는 물줄기 사이 즉 쌍계 사이에 선잠단지가 자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성북동길과 선잠단지길 등 큰 길과 집들로 둘러싸인 조그만 터전에 홍살문과 철제 울타리를 둘리고 뽕나무 46주가 가득 식재된 공간 안에 ‘先蠶壇址(선잠단지)’라고 새긴 표석만이 설치되어 있다.

조선 성종 2년(1471)에 이곳에 선잠단을 처음 조성하였으며, 앞쪽 끝에 뽕나무를 심어 궁중의 잠실(蠶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하였다.

중국에서 전래된 선잠제

선잠단지는 누에치기를 처음 했다는 중국 상고 전설시대의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하나인 황제(黃帝)의 황후 서릉씨 누조를 누에치기의 창시자이자 누에신으로 모시고 제향을 위해 단(壇)을 쌓고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한편 황제의 황후 서릉씨 누조가 누에신으로 모시게 된 전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여러 마을을 통합한 ‘황제’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아름다운 왕비 서릉씨의 여식인 누조(嫘祖)가 평화로운 정원의 뽕나무 아래에 앉아 뜨겁고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가 뜨거운 잔속으로 ‘퐁’하고 떨어졌다. 이에 왕비가 무심코 나무 위를 보자 그곳에는 수백 개의 하얗고 둥근 누에고치들이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왕비가 누에고치를 건져내려하자 가늘고 반짝이는 실이 계속 잡아당겨졌다.

햇빛에 반짝이는 실을 보자 왕비는 이것으로 실을 만들어 황제를 위한 멋진 옷을 만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길쌈을 할 수 있을 만큼 여러 가닥의 실을 꼬아 두껍게 한 후 천을 짜게 하였다.

그래서 꽃잎보다 부드럽고 빛나는 비단이 완성되었다. 이 천을 본 황제는 크게 감탄하였다.

그리고 선잠제와 관련된 중국의 채상 기록은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에 보이고 있으며, 선잠제가 유교적 국가 제사로 제도화 된 것은 한(漢)나라 때이며 당(唐)나라 이후 사전(祀典)에 중사(中祀)로 규정되었다.

여기서 황제(黃帝)의 비로 알려진 서릉씨 누조에 대한 중국 사서(史書)의 내용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따르면 누조는 황제의 원비이자 누에치기의 창시자이다. 그녀는 서릉족의 딸로서 황제의 정실이 되어 현호(玄囂)와 창의(昌意) 두 아들을 낳았다. 이중 창의는 촉산(蜀山)씨의 딸을 아내로 맞아 고양(高陽)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바로 전욱(顓頊)으로 황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황제가 구려(九黎)족을 물리친 다음 축하하는 자리에서 누에의 신인 잠신(蠶神)이 눈이 부실정도로 빛나는 황․백(黃白) 두색의 실을 바쳤다. 누조는 이것에서 계시를 얻어 몸소 뽕잎을 따서 누에를 기르고 고치에서 실을 뽑은 다음 아름다운 옷감을 짰다.

그리고 《수서(隋書)》 예의지(禮義志) 기록에 의하면 누조는 잠신이라는 뜻의 ‘선잠(先蠶)’으로 받아들여졌다. 처음으로 잠업을 시작한 신이라는 뜻이다. 민간에서는 ‘잠화낭자(蠶花娘子)’라고 부르기도 한다.

《통감외기(通鑑外紀)》에 의하면 서릉씨의 여식인 누조는 황제의 비인데, 그녀는 처음으로 누에를 길러 누에를 쳐서 그것으로 비단으로 만든 의복을 백성들에게 입을 수 있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이렇게 잠신 서릉씨 누조에 대한 기록이 전설시대를 엮은 내용이 전해지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누에치기를 처음 가르치고 비단을 처음으로 짜서 의복생활의 혁신을 가져왔다는 기본 이야기는 공통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누조는 오늘날 누에치기와 비단의 여신으로 중국의 직물이나 비단과 관련된 박물관이 대형 판매장 및 제조공장 등에서 상징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 선잠단지 입구 홍살문. [나각순 제공]
우리나라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조선시대의 선잠제

우리나라의 선잠(先蠶) 제의(祭儀)는 중국의 옛 제도를 본받아 고려 초에 시작되었다.

《고려사》 권62 예지(禮志) 4, 길례(吉禮)중사(中祀) 선잠조(先蠶條)에 보면 선잠단의 규모는 사방이 2장(丈)이고 높이가 5척(尺)이었으며, 사방으로 섬돌이 나 있었다. 제향일은 계춘(季春, 3월) 길(吉)한 사일(巳日)에 행하였고, 축판(祝板)에는 ‘高麗國王 王某敢明(고려국왕 왕모감명)’이라고 하였다. 폐백은 흑색으로 길이는 8척이었고 재물은 돼지를 썼으며, 헌관(獻官)은 태상경(太常卿)이 초헌, 예부낭중이 아헌, 태상박사가 종헌을 하였다.

태사령(太史令)이 선잠인 서릉씨 누조의 신위판을 단상에 설치하고 치제하였는데, 제의는 선농단(先農壇)과 같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의 선잠단제도를 계승하였는데, 농본민생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고려시대보다 강화된 운영의 면모를 보였다. 정종 2년(1400) 3월에 처음으로 선잠제를 지냈다. 이후 선잠제는 매년 3월 첫 번째 뱀날(初巳日)에 거행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500여 년간은 농업과 잠업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농업을 주관하는 신을 동대문구 제기동의 선농단에서, 잠업을 주관하는 신은 선잠단에 모시고 국가에서 매년 제사를 지냈다.

나라에서는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기 위해 국왕은 친경(親耕)을 하고, 왕비는 궁중 안에 단을 꾸며 내명부․외명부들을 거느리고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매년 늦은 봄(음3월) 길(吉)한 뱀 날〔巳日〕에 혜화문 밖의 선잠단에 풍악을 울리고 제사를 지냈다고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소개되어 있다.

이 날 조정에서는 선잠제가 국가의식이므로 대신을 보내어 제사를 주관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세종 연간에는 누에치기, 즉 양잠(養蠶)을 크게 장려하여 각 도마다 적당한 곳을 골라 뽕나무를 심도록 강력히 종용하였고, 한곳 이상의 잠실을 지어 누에를 키우도록 하였다.

누에 실이 생산되면 국가에서 엄밀하게 심사하는 것을 제도로 삼았다. 그리고 민간에게 양잠업을 권장하기 위해 국립양잠소인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하였다.

서울에는 동잠실(東蠶室, 현재의 송파구 잠실동으로서 한강개발 이전에는 광진구 지역의 샛강으로 이어져 ‘아차산잠실’이라고도 하였다.), 서잠실(西蠶室, 서대문구 연희동으로 현재 연세대학교 일대에 해당된다.), 신잠실(新蠶室, 서초구 잠원동 일대)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이러한 서울 근교에 잠실이 많이 자리한 것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하고 서울에 천도한 후 경복궁에서 남주작(南朱雀) 목멱산(木覓山, 남산)을 바라보니 그 정상이 누에머리를 닮을 것을 보고, 그 사방에 뽕나무를 많이 심은 데서 유래된 것이라는 일화도 있다.

이어 태종 16년(1416) 2월 양잠을 국가적인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잠실도회를 설치․운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여 우선 지방에 시범 잠실도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것을 잠실도회의 효시로 보고 있는데, 그 목적은 백성들로 하여금 양잠법을 견문시키고 이를 본받아 양잠 기술을 익히도록 함에 있었다. 이때 선잠단의 규모를 보면 사방 2장 3척, 높이 2척 7촌, 동·서 양유(兩壝, 담장)로 제단이 마련되었다.

동서 담장인 유(壝)에는 유문이 설치되었다. 헌관(獻官)은 정1품, 희생(犧牲)은 양․돼지 각 1마리로 하고 제의 내용을 새롭게 하였다.

이러한 제의 내용은 조금 정리되어 세종 때 착수하여 성종 때 완성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규정되었다. 그리고 서울지역에 잠실을 설치한 시기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세종 때로 추정된다.

단종 2년(1454) 9월에 호조(戶曹)에서 잠종(蠶種)을 받아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고, 각 고을의 도회관(都會官)에게 양잠을 하게 하여,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살펴 수령을 포폄하게 하였다.

또 세조 1년(1455) 1월에는 창덕궁 후원의 뽕나무를 여러 관아에 나누어 주어 심게 하고 배양에 힘쓰게 하였다. 그리고 성종 2년에 현재의 성북동 선잠단을 처음 설치하였으며, 성종 8년(1477) 3월에 왕비가 최초로 친히 채상단(採桑壇)에 나아가 친잠례를 행하였다.

이때 제사는 제관이 행하고, 왕비는 친잠의식만 행하였다. 이후 조선시대 왕비의 큰 행사 가운데 하나는 친잠례(親蠶禮)를 지내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모두 8차례의 친잠례를 행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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