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잠단지(先蠶壇址) ②
선잠단지(先蠶壇址) ②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4.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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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 37]

▲ 신잠실 뽕나무-서초구 잠원동에 있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호 잠실리 뽕나무. [나각순 제공]
성종 8년 왕비의 친잠례 때 선공감(繕工監)에서 창덕궁 후원에 사방 3장(丈) 높이 5척 7촌의 채상단(採桑壇)과 잠실이 설치되었으며, <친잠의(親蠶儀)>가 완성되었다.

왕비가 친잠례를 거행한(부용지 위에 있는 주합루 옆 서향각은 순종의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가 조선왕조 마지막으로 친잠례를 행한 곳으로 ‘親蠶勸民’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후,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내․외명부의 하례를 받았으며 백관들도 연영문(延英門)에서 전(箋)을 올려 진하하였다.

왕후의 친잠의식 때는 국의(鞠衣, 뽕잎색으로 쌍봉문의 흉매를 달았다.)를 입고 머리장식〔首飾〕을 해야 한다는 예조(禮曹)의 주청대로 시행하였다. 친잠례를 마치면 의정부와 육조의 당상관을 비롯한 선공감 제조 등에게 음악과 술을 내리고 내․외명부에게도 노주연(勞酒宴)을 행하고 물건을 내려주었다.

성종 때의 친잠의식을 보면 집사(執事)의 뽕 채취는 1․2․3품 내․외명부에서 1~2명이 선출되었고, 종채상(從採桑)에는 외명부로서 1~3품의 옹주․제종재(諸宗宰)와 각 승지의 부인이었으며, 상의(尙儀)․상궁․상기(尙記)․상전(尙傳)․상공(尙功)․전제(典製)가 각 1인씩이고, 전빈(典賓) 4인은 내․외명부와 제잠실(諸蠶室)․집구광(執鉤筐)을 각각 인도하였다.

외명부의 뽕잎 채취는 계집 시종을 시켜 구광(鉤筐, 갈고리와 광주리)을 교자에 싣고 친잠소(親蠶所)에 나아가 상전에게 두어 구광을 잡은 자에게 준다. 왕비가 가마를 타고 나오면 내명부가 수행한다. 왕비가 가마에서 내려 연(輦)을 타면 집사자가 구광을 연에 싣고 행유(行帷)로 가리고, 내명부는 교자를 타고 따른다. 뽕잎 채취에 응하는 계집 시종 구광을 교자에 싣는다.

친잠소의 단 동문 밖에 이르면 왕비가 연에서 내려 채상위(採桑位)에 나아가 동향하여 서면 상공은 갈고리를 받들어 올리고, 왕비는 갈고리를 받아 뽕을 따고, 전제는 광주리를 받들어 뽕을 받는다. 왕비가 뽕을 딴 다음 내·외명부도 차례로 뽕을 딴다.

내·외명부가 잠실로 가고 상공은 뽕을 잠모(蠶母)에게 주면 잠모는 뽕을 받아 썰어서 내명부에게 주어 누에를 먹이게 하고 잠박(蠶箔)에 모두 뿌린 뒤 왕비는 환궁한다.

그리고 성종 24년(1493) 3월 왕비가 후원의 채상단에 나아가 왕세자빈과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친잠례를 행하였다. 이때 왕세자와 백관들은 진하(陳賀)하고, 권정례(權停禮, 왕이 참석하지 않는 등 절차를 다 밟지 않고 행하는 의식)를 올리고 채상녀(採桑女)와 잠모에게 면포를 내리고 중궁은 선정전에 나아가 노주연(勞酒宴)을 행하였다.

이때의 축문을 보면 “잠상(蠶桑)을 시작하여/우리백성에게 은혜롭게 하시니/우리 사사(祀事)를 흠향하시고/복록(福祿)을 거듭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렇게 선잠단에 관리를 보내 제향의식을 매년 3월에 행하여 오다가, 중종 1년(1506년)에는 여러 도의 잠실을 서울 근교로 집결하도록 시켰다. 그리고 중종 8년(1513) 3월에 중궁전에서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후원에서 친잠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4월에는 중종이 하교하기를 “고서(古書)에 보니 궁중에서 양잠하여 모든 귀한 신하에게 나누어 주는데, 이는 근본에 힘쓰는 뜻이다.

근자에 내전에서 양잠한 생견(生繭) 약간을 의정부와 승정원에 내려줌은 내가 근본에 힘쓰는 뜻과 궁중에서 양잠한 공을 보이는 것이다.”하고 하면서 후원에서 양잠한 말리지 않은 생고치를 고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성현의 《용재총화》10권에는 “선잠제는 음력 3월에 풍악을 써서 제사를 지낸다.”고 되어 있어 선잠제 거행 때 일무(佾舞)와 제례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종 24년 2월에 중궁전이 친잠례를 창덕궁 후원에서 행하였는데, 이 보다 앞서 친잠단의 터를 정하도록 명하고 있어, 예조에서 옛 단을 보고 조금 옮겨서 새로 축조하였다. 또 선조 5년(1572) 3월에 중궁전에서 친잠례를 행하였다.

한편 영조 43년(1767)에 예조에서 편찬한 《친잠의궤(親蠶儀軌)》가 규장각에 전하고 있는데, 이는 이해 영조 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가 친히 누에를 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그 내용을 보면 친잠일(親蠶日)을 3월 10일이며, 이에 앞서 선잠제는 3월 5일에 거행되었다.

그리고 친잠에 따른 제반 절차와 소용되는 집기 등에 관해 예조와 관련 관아 사이에 오고간 공문과 진행과정에 대한 제반 의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해 3월 상사일(上巳日) 헌작례(獻爵禮) 때는 중궁전에서 예복을 갖추고 행례를 하였으며, 친잠 때는 상복(常服)으로 갈아입고 채상위에 나아가 뽕잎 5가지를 따는 5조(條)의 예를 행하고 채상단 남쪽으로 나아갔다.

이어 혜빈궁(惠嬪宮)과 세손빈궁은 채상 7조, 그 다음 내․외명부가 채상 9조를 행한 뒤 자리하여 앉는다. 이때 잠모(蠶母)가 내집사(內執事)와 함께 다식(茶食)을 시상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이 왕세손과 백관을 거느리고 교서를 반포하고 진하였다.

즉, 영조는 선잠의 주인인 서릉씨에게 먼저 헌작례를 행하고, 다음 채상례를 행하는 친잠례를 행하였는데, 제문 머리에는 “조선국 왕비모씨”로 칭호를 붙이게 하였다.

이때 경복궁 강녕전 옛터에서 중전, 혜빈, 세손빈이 삼헌례로 선잠에게 향사하고, 이튿날 창덕궁 후원에서 채상례를 행할 때는 내․외명부만 4배의 예를 행하였다. 이때 기악(妓樂)은 쓰지 않고 행례 때만 관현(管絃)을 사용하여 풍악을 연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양잠은 명례궁(明禮宮)에서 하고, 5월 하지(夏至)에 장종수견례(藏種收繭禮)를 행하고, 29일에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중외에 알리고, 중전에게는 하례하였다.

즉 왕과 왕비가 강녕전으로 나아가니, 혜빈․세손빈과 내․외명부 수반(首班)이 축사를 올리고, 왕세손(정조)이 백관을 거느리고 하례를 올렸다. 그리고 잠모에게 무명베를 내리고 백성들의 채무를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영조 46년(1770)에는 경복궁 강녕전 터에 친잠단을 세우고 왕의 친필로 ‘丁亥親蠶(정해친잠)’이라고 1767년의 친잠례를 기리는 비문을 새기기도 하였다.

한편 선잠제는 선잠단에서 정1품 초헌관이 주관하는 제사와 창덕궁 후원의 채상단에서 진행하는 친잠례의 2단계로 거행되었다. 1단계 제사는 5일간의 재계(齋戒)와 2일간의 제수(祭需) 진설, 전날의 희생(犧牲) 검사와 향축(香祝) 전달 등 준비과정을 거쳐, 제사 당일 헌관이 도착하면 시작되었다. 제향은 전폐(奠幣)․작헌(酌獻)․송신(送神) 순서로 진행되었다.

제사가 끝나면 왕비가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궁을 나와 후원의 채상단에서 친잠례를 행하였는데, 이때 왕비는 뽕잎 5가지를 따고, 이후 내외명부 1품은 7가지, 2․3품은 9가지를 차례로 딴다. 채상을 마치면 왕비는 궁으로 돌아가고, 내․외명부는 잠실에서 뽕잎을 누에에게 뿌리며 의식을 마치게 된다.

한편 우리 조상들은 명주를 만들어내는 누에를 하늘이 내린 천충(天蟲)으로 생각하여 매우 신성시하였다.

따라서 나라에서는 누에를 치는 사람이 모두 여인인 것을 감안하여 궁궐의 환관들을 감독관으로 보내어 매우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각 잠실에서는 실을 뽑아서 승정원(承政院)에 바쳤는데, 실의 정교함과 수량에 따라 나라에서는 포상을 하여 치하하거나 벌을 주기도 하였다.

즉 전근대국가의 양잠은 농경과 더불어 국가에서 권장하는 중요한 산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왕은 선농단에 나아가 친경을 하고, 왕비는 선잠제를 주관하고 친잠을 하게 됨으로써 백성들에게 권농상(勸農桑)의 시범을 보여 나라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 동잠실 뽕나무-송파구 잠실동(현존하지 않음). [나각순 제공]
선잠제의 중단과 85년만의 재현과 유적

선잠단은 사직단(社稷壇)과 같은 형식으로 쌓아 중국 잠신(蠶神) 서릉씨(西陵氏) 누조(嫘祖)의 신위를 모셨다. 단의 남쪽에는 한 단 낮은 댓돌이 있고, 그 앞쪽 끝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하였다.

융희(隆熙) 2년(1908년) 7월 선잠단은 선농단(先農壇)의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옮겨 배향되면서 그 터는 어느덧 폐허화 되어갔다. 선잠단은 일제강점 후 관리가 되지 않다가 훼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으나 그 유지는 1939년 10월 18일 보물 제17호로 지정되었으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83호로 재지정 되면서 정비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성북구청에서 제향이 중단된 지 85년만인 1993년 5월 16일 고증과 자문을 거쳐 선잠제(先蠶祭)를 재현해 2010년까지 18차례 행사를 진행하였다.

즉 매년 5월 ‘성북구민의 날’ 축제인 ‘아리랑축제’의 서막을 장식하고 있다. 이때는 홍살문 안에 빽빽이 심어져 있는 뽕나무 사이에 제단을 마련하고 제례를 재현하고 있다.

행사 종목에는 선잠왕비행차와 선잠제향이 있다. 선잠제향은 영신례·전폐례·초헌례·아헌례·종헌례·음복례·망료례의 7례로 진행된다. 이때 성북구 거주자로 선잠왕비 1명과 선잠공주 2명을 공모로 선발하기도 하였다.

한편 현재 선잠단과 관련하여 서울에는 잠실 지명과 유서 깊은 뽕나무가 존재한다. 송파구 잠실동에는 1970년대 잠실이 육지화 되어 도시로 개발되기 전까지 이 지역에는 수령이 500여년의 뽕나무가 있었다. 세종 때에 심었던 나무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서초구 잠원동 1-54번지에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호 뽕나무 고목의 밑둥과 어린나무 여러 주가 식재되어 있다. 이곳 역시 서울로 편입되기 전에는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와 신원리로 부르던 곳으로, 조선시대 신잠실이 설치된 잠업단지였다.

또 뽕나무의 식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뽕나무는 뽕나무 과(科) 뽕나무 속(屬)에 속하는 낙엽 교목(喬木) 또는 관목(灌木)으로서 오디나무, 새뽕나무라고도 한다. 중국, 우수리, 몽골, 코카사스, 중앙아시아, 유럽 등지에 넓게 분포하며 북위 약 60도까지 식재된다.

가지에 가시가 있으며 작은 가지에 털이 있다. 잎은 3개로 갈라지는 것과 가장자리가 밋밋하고 난형(卵形)인 것이 있다. 3개로 갈라지는 잎은 끝이 무디고 원저(圓底)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한 것은 끝이 예리하고 넓은 예저(銳底)이며 길이 6~10㎝, 나비 3~6㎝로서 표면에 잔털이 있고, 뒷면에 융모(絨毛)가 있다.

잎자루(잎꼭지)는 길이 15~25㎜로서 털이 있다. 꽃은 이가화(二家花) 즉 암수의 꽃이 각각 다른 나무에 피는데, 5~6월에 피며 열매는 취과(取果)로서 둥글며 지름 2~3㎝ 정도로서 육질(肉質)이고 9월에 적색으로 익으며, 수과(瘦果, 익어도 껍질이 터지지 않는 열매)는 5㎜정도로서 흑색이다. 과육(果肉)은 달고 먹을 수 있다. 산뽕나무에 비해 암술대가 짧고 잎의 톱니가 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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