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림의 숲과 씨의 약효, 살구나무
행림의 숲과 씨의 약효, 살구나무
  • 송홍선 민속식물연구소장
  • 승인 2011.04.25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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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홍선의 ‘풀꽃나무 타령’ 95]
▲ 살구나무 열매. [송홍선]

옛 사람들은 의술계(의원)를 ‘행림(杏林)’이라 불렀다. 행림은 ‘살구나무의 숲(밭)’이란 뜻이다. 이 말이 생겨난 유래는 ‘신선전(神仙傳)’에 잘 나타나 있다.

중국 한나라 후관이라는 곳에 살았던 동봉은 독약을 먹고 죽은 뒤 사흘이나 지난 두섭을 환약 3알로 살렸다. 그 후 그는 산기슭에서 지내며 오로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전념했다.

의사 동봉은 인술을 베풀고도 보수를 받지 않았다. 그는 치료비 대신 중환자에게는 살구나무 5그루를 심게 하고 , 경환자에게는 1그루를 심게 하여 무려 10만 그루의 살구나무 밭을 만들었다. 그래서 살구나무 숲이 우거졌기 때문에 행림이 의술계를 뜻하게 됐다.

그리고 그 밭에 살구나무 열매가 열리자, 동봉은 사람들에게 곡식을 가져와 그 값어치만큼 열매를 따 먹으라고 했다. 만약 곡식을 갖다 넣지 않으면 호랑이가 나타나서 그 사람을 혼내주고 죽였다. 그러나 동봉은 다시 곡식을 가져오면 그 사람을 곧 살아나게 했다. 이렇게 하여 곳간에는 곡식이 쌓였고, 동봉은 그 곡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살구나무 행(杏)자가 의술과 관계된 말은 행림 이외에도 행인수(杏仁水)에서도 찾을 수 있다. 행인수는 살구나무 씨로 만든 기침 물약인데, 한방에서는 살구나무 씨를 진해, 거담제로 쓰고 있다. 일본에서는 300여 년 전에 어느 공주가 살구나무를 성 안에 심고, 천식으로 인한 기침을 할 때마다 말린 그 씨를 씹어 먹고 발작을 진정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양에서는 살구나무의 씨에 대한 약효가 각종 의서에 많이 나와 있다. 동쪽으로 뻗은 살구나무의 가지에서 딴 5개의 씨는 동쪽에서 흐르는 물에 담가 두었다가 이른 새벽에 이를 잘 씹어 먹으면 오장의 잡물을 씻어 없애고 육부의 풍을 모두 몰아내며 눈을 맑게 할 뿐만 아니라 간신(肝腎)의 허를 메운다는 것 등이다.

또한 ‘본초강목’에는 폐기, 한열, 중풍, 하혈 등 200여 가지에 씨의 약효가 좋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인에게 아이를 낳게 하고, 얼굴의 기미를 제거하는 데에도 살구나무 씨가 사용됐다.

살구나무 씨의 약효는 서양에도 널리 알려진 바 있다. 미국에서는 1970년대 말에 ‘살구나무 씨 파동’으로 사회가 혼탁해질 정도였다. 당시에 미국인들은 비타민 B15(팬가믹산, pangamic acid)이라는 기적의 비타민 알약이 암과 비듬을 제외한 모든 병을 낫게 하는 만병통치약으로 믿었다.

미국인은 팬가믹산이 모두 살구나무 씨에서 추출되는 것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살구나무 씨 파동은 계속됐다. 당시에 미국 식품의약국에서 살구나무 씨의 약효가 없다고 하여 판매 금지를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파동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한편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후한의 재상 조조가 뜰에 살구나무를 심고 가꾸었으나 매일 열매가 줄어들자 도둑놈을 잡기 위해 꾀를 부렸다. 그래서 그는 머슴을 모아 놓고 맛없는 개살구나무를 전부 베라고 했다. 그때 한 머슴이 ‘이 살구는 맛이 좋습니다’라고 말하자, 조조는 이놈이 도둑이구나 하고 살구나무 도둑을 잡았다.

옛 사람들은 살구가 많이 달리는 해는 병해충이 없어 풍년이 드는 것으로 믿었고, 살구나무가 많은 마을에는 병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산길을 갈 때 살구나무 지팡이나 이 나무로 만든 목탁을 들고 가면 사나운 짐승이 덤벼들지 못했다고 한다. 중국의 농가에서는 이 꽃이 피는 때를 봄 농사의 시작으로 여겼다.

▲ 살구나무 꽃. [송홍선]

우리 속담에서 ‘빛 좋은 개살구’는 겉만 좋고 실속이 없음을 뜻하며, ‘개살구도 맛들일 탓’은 사람들의 성질을 나름대로 길들이면 어떤 사람이라도 적소에 쓸 수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두자미의 시 ‘청명절’에 나오는 ‘행화촌(杏花村)’은 술집이나 술집 아가씨가 있는 마을을 뜻한다.

꽃말은 아가씨의 수줍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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