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①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①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4.27 08: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 38]
▲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 [나각순 제공]

법천사(法泉寺)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은 고려 지광국사의 부도탑으로,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법천사 터에 지광국사의 탑비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탑비를 세운 때가 고려 선종 2년(1085)이므로 묘탑의 조성 시기는 국사의 입적 직후인 1070∼10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원래 소재지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지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일본 오사카(大阪)까지 몰래 빼돌려졌다가, 다시 반환되면서 경복궁 경내에 위치에 세워졌다.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 때 파손되어 버렸고, 1957년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는데,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되면서 이전 논란이 있었으나 훼손 가능성이 있어 경복궁 경내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 탑이라면, 수행이 높았던 스님의 사리를 두는 곳이 부도이다. 구성은 석탑과 비슷해서, 기단(基壇)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게 된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부도가 8각을 기본형(팔각원당형)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이 부도는 전체적으로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또 부도 전체에 여러 가지 꾸밈을 두고 자유로운 양식에 따라 만들어졌는데도, 장식이 정교하며 혼란스럽지 않다. 따라서 각부의 조각과 장식성이 뛰어나 우리나라 부도 중 최고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의 재료는 화강암이고 높이는 6.1m이다. 전체적인 구성은 지대석․기단부․탑신부․상륜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대석(바닥돌)은 매우 넓고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각층의 높이와 넓이에서 변화를 주었는데, 특히 지대석 네 귀퉁이에 용의 발톱을 조형화 한 조각이 지면까지 닿아서 지상에 완고하게 밀착된 듯하여 안정감을 한층 높여 주고 있다.

기단부는 이중기단인데, 상․하단을 구성하고 있는 석재는 모두 7단이나 되며 각부에 장식이 가득히 베풀어져 있다. 그 중 기단의 맨 윗돌인 최상층의 갑석 네 면에는 화려한 장막형(帳幕形)이 드리워져 있어 장엄을 더한다.

뿐만 아니라 기단부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 운룡(雲龍), 연화(蓮花), 초화(草花), 보탑(寶塔), 신선(神仙) 등이 가득히 조각되었다. 하층 기단 네 귀퉁이에는 본래 사자(獅子) 1구씩이 있었으나, 언제인가 없어져 버렸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으로 구성되는데, 탑신에는 앞면과 뒷면에 문짝을 본떠 새긴 문비형(門扉形)과 자물쇠가 사실적으로 조각되었다. 이는 사리를 모시는 곳임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좌·우면에는 페르시아풍의 영창(映窓)을 조각하고, 그 둘레에 다시 둥근 구슬〔환주(環珠)〕로 장식하였다.

옥개석(지붕돌)은 네 모서리를 치켜 올린 천개형(天蓋形)으로 장막이 늘어지고, 옥개석 낙수면에 해당하는 전각부(轉角部) 밑면에는 불(佛)․보살(菩薩)․봉황(鳳凰) 등을 조각해 놓았다.

상륜부(相輪部)는 머리장식으로 앙화(仰花), 복발(覆鉢), 보개(寶蓋), 보주(寶珠)가 층층으로 올려 비교적 잘 남아있는데, 그 전면에도 조식(彫飾, 조각장식)이 가득하다.

이러한 묘탑 전체의 형태를 보더라도 풍부한 창의력과 고도의 예술성이 가미된 의장(意匠)을 느낄 수 있으며, 각 부의 조각 역시 매우 정교하다. 반면에 화려하게 꾸민 장식으로 인해 부도로서의 장중하고 엄숙한 멋을 줄어들게 하고, 지나치게 기교에 치우쳤다는 점도 지적된다.

그렇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부도 가운데 다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한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기단의 네 귀퉁이마다 1마리씩 놓여 있던 사자상은 일찍이 도둑맞아 지금은 한 마리도 남아있지 않다.

법천사와 해린

법천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져 고려시대에 크게 융성한 법상종(法相宗) 계열의 사찰이다. 지광국사는 법명이 해린(解麟, 984~1067)으로 1004년 승과에 급제한 후 대덕(大德)이 되고, 현종 2년(1011) 대사(大師), 1021년 중대사(重大師)가 되었다.
 
그 뒤 덕종 때 삼중대사(三重大師)와 수좌(首座)를 거쳐 정종(靖宗) 때 국통(國統)이 되었다. 문종 8년(1054) 개성의 현화사(玄化寺) 주지가 되고, 1056년 왕사(王師)를 거쳐 1058년 개경 봉은사(奉恩寺)에서 국사(國師)에 올라 왕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1067년 원주 법천사에서 입적하였다. 법천사지에 탑비가 남아 있는데, 비문에 의하면 지광국사가 입적한지 18년 뒤에 비석이 세워졌다.

법천사는 법상종 사원으로 신라 이후 고려 전반기까지 융성하였던 사원이다. 법천사는 이미 신라 이후 관단(官壇)이 설치되어 이 지역의 중심사원으로 역할을 하였는데 중원부(中原府) 출신 진관선사(眞觀禪師) 석초(釋超, 912~964)는 7세인 918년 영암산 여흥선원(麗興禪院) 법원대사(法圓大師) 밑에서 출가하였으나 928년 법천사 현권율사(賢眷律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고 한다.

이로 보아 법천사는 아마 삭주(朔州)와 북원부(北原府)에서는 유일한 관단사원(官壇寺院)으로 원주에서 가까운 중원부 출신인 석초는 법천사에서 구족계를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법천사에는 해린의 스승인 관웅대사(寬雄大師)가 법상종 교학을 전수시키고 있었고 원주출신 지광국사 해린(984~1070)은 8살의 나이로 관웅 밑에서 수학하게 된다.

해린은 16세인 999년에 용흥사(龍興寺)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숭교사(崇敎寺) 개창 기념법회에서 초직을 받았다. 해린은 다시 법천사 관웅대사를 찾아가 해린(海鱗)이라는 법명과 거룡(巨龍)이라는 자(字)를 받고, 21세인 1004년에는 왕륜사(王輪寺)의 승과(僧科)에 나아가 급제하고 대덕(大德)의 법계를 받았다.

이후 해린은 계속 승진하였고 현종, 덕종, 정종, 문종 때를 지나는 동안 무난히 승진하여 73세인 1055년 왕사에 추대되었다. 그 사이 덕종 때에는 궁중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의하였고, 문종 1년(1046)에는 궁중에서 유심묘의(唯心妙義)를 강의하였다. 84세인 문종 21년(1067) 법천사로 돌아와 1070년 87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장례는 문종이 원주 창고에 있는 양곡으로 법요식에 충당하도록 한 것으로 보아 국가적인 지원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입적 후 15년만인 선종 2년(1085) 해린의 부도와 부도탑비가 건립되었다.

즉 해린이 법천사에 거주했던 시기는 관웅 밑에서 수학하고 관웅을 따라 나선 시기까지, 현종 1년(1010) 법천사로 관웅을 만나러 온 이후 1021년 명주 수다사(水多寺)로 옮길 때까지 약 10여 년간, 이후 현화사 주지 등 중앙에서 활동하다가 문종 21년(1067) 법천사로 하산한 다음 1070년 입적할 때까지 4년간이 된다. 

해린은 어려서부터 법천사에서 법상종을 수학하였고 거란의 침입시기인 현종 1년 이후 10년간인 청년시절에도 법천사에 머물면서 법상종의 교학 연구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해린이 입적한지 15년에 그의 부도탑과 탑비가 건립되는 것을 보면 국가적인 지원 속에서 그 사이 그의 추모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법천사 지광국사비(法泉寺 智光國師碑)>음기에는 1400여명의 제자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중 최고 책임자는 현화사주 승통 소현(韶顯)과 속리사주 승통 석탱(釋竀)이라고 할 수 있다.

해린의 직제자 소현은 1030년 해린이 개경 해안사(海安寺) 주지였을 때 그의 밑에서 삭발한 고려 대표적 문벌귀족이었던 이자연(李子淵)의 다섯 째 아들이고, 승통 석탱은 문종의 여섯 째 아들로 소현의 직제자이다. 그 외에 음기에는 인주 이씨 이정(李頲)의 아들로서 현화사(玄化寺) 승려 세량(世良)과 의천(義天)에게 유식학(唯識學)을 가르쳤던 우상(祐祥), 수주 최씨 최사위(崔士威)의 손자로 관오(觀奧)에게 유식을 가르쳤던 상지(尙之) 등 당시 쟁쟁한 가문을 가진 유식학 승려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이들이 해린의 추모 사업을 주도하여 국가와 인주이씨 등 문벌귀족들의 후원 속에서 우리나라 최고 양식과 기술로 부도와 탑비를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회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