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②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②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5.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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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 38]
▲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 [나각순 제공]

법천사지 발굴에서 특별히 해린의 부도탑과 탑비를 위한 예배시설인 탑비전(塔碑殿)이 마련되었음이 확인된 것은 그들이 심혈을 기울인 정도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러한 법천사에서의 해린 추모 사업은 법천사가 인주 이씨 문벌귀족세력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들의 정치적 행보에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인주이씨 권력과의 관련은 법천사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특히 법천사는 1126년 이자겸의 난이 실패한 후 사세가 많이 줄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증승통 덕겸묘지명(圓證僧統 德謙墓誌銘)>에 의하면 인종 초 국척 이씨가 정권을 천단하였다. ㅁ

그의 아들(義莊)이 승려가 되어 현화사에 있으면서 귄세에 의지하여 위엄을 부리면서 여러 노사와 유덕한 승려들을 문도로 삼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권세에 아부하는 사람들이 그의 문에 가득하였다. 사(師, 덕겸) 만이 홀로 노하여 꾸짖기를 ‘스승이 있는 곳에 도가 있는 것이어늘 어찌 달사(達士)들이 권세 있는 호강에게 핍박이 되어 어린아이의 문객이 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씨 아들이 크게 노하여 그를 헤치려고 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병오(1126년)에 궁궐 안에서 난이 일어나자 이씨 아들이 승도를 거느리고 개경으로 올라와서 강제로 동반하려 하였다. 스님은 병을 이유로 사양을 하고 문중 2인과 함께 남쪽 삼각산 향림사에 잠깐 머물렀다하여 이자겸의 아들 의장(義莊)이 현화사에 있으면서 국왕의 외척이라는 권세를 믿고 수좌가 되어 여러 큰스님과 덕이 높은 사람들을 핍박하여 자신의 문도로 삼으려 하였고,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덕겸을 강제로 자파로 포섭하려 하여 덕겸은 삼각산(三角山) 향림사(香林寺)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이자겸의 난이 진압된 후 덕겸은 삼중대사(三重大師)로 승진하여 천흥사(天興寺)에 주석하였는데 이후 덕겸은 조정에서 법천사 승려들의 횡포가 극심하다는 것을 듣고 스님에게 가서 주지하기를 명하니 수개월 되지 않아 절(법천사)의 승려들이 다스려져 조용해지니 승통을 더하게 되는 등 덕겸은 법천사의 소요를 파견된 지 몇 달 만에 진정시키고 있다. 법천사의 소요는 법천사가 이자겸의 난에 관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주이씨가 세력을 상실하게 되자 그의 추종세력들이 일으킨 것으로 추측되는데 덕겸이 파견되어 수습한 것이다.

이후 법천사에는 고려 전기 수문하시중으로 수상을 지낸 최사위(崔士威)의 현손이자 최계방(崔繼芳)의 2자인 관오(觀奧, 1096-1158)가 수좌(首座)로서 1146년 주지가 되어 1154년 수리사(修理寺) 주지로 가기까지 만 8년간 있었으나 법상종의 주도세력이 정현계로 넘어가자 법천사는 그 이전의 번영은 회복하지 못 하였고 지방의 거대 사찰만으로 만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려전기의 법상종의 동향은 신라시대와 같이 2계통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안성 칠장사를 중심으로 한 정현계와 법천사를 중심으로 한 해린계이다.

정현계는 영염(靈念)-순진(順眞)-덕겸(德謙)-각관(覺觀)으로 이어지는데 영념과 덕겸은 청주김씨 출신으로 정현계는 진표계 법상종의 전통을 이으면서 계행의 실천과 포교활동을 활발히 하고 덕겸의 경우와 같이 염미륵불(念彌勒佛)하는 실천적인 면이 강하였다. 정현계는 이자겸의 란 이후 두각을 나타나게 된다.)
법상종은 미륵을 주존으로 숭배하기 때문에 법천사에는 미륵신앙이 상당히 성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법천사는 고려 전기 법상종의 한 맥인 해린계 법상종의 본산으로 신라 이래 교학을 중심으로 하는 태현계 법상종을 이어와 미륵과 아미타신앙을 함께 수행하는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법천사에서도 대동소이하였을 것으로 당시 법상종의 종찰인 현화사의 경우 현종 12년(1021)에 건립된<현화사비(玄化寺碑)>음기에 의하면 현종(顯宗)의 발원으로 미륵보살회(彌勒菩薩會)와 미륵불회(彌陀佛會)를 매년 개설하도록 하였는데 미륵보살회는 방가(邦家)의 정성(鼎盛)과 사직(社稷)의 큰 평안을 축원하기 위하여 매년 4월 8일부터 3일3야(夜) 개설케 하였다.

미타불회는 현종 양친(兩親)의 명복을 추천하기 위해서 매년 7월 15일부터 3일3야를 개설케 하였다. 미륵보살회는 하늘에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앙이 되었을 것으로 미타불회는 현화사를 창건한 현종 부모의 추선을 위한 정토신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즉 미륵은 국가의 평안함을 기원하는 현세적인 것으로, 아미타는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내세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해린의 직제자 소현(韶顯)의 경우<금산사 혜덕왕사비(金山寺 慧德王師碑)>에 나오는 바와 같이 법상종 교학과 학맥을 중요시하고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 철저한 계율의 수행, 경전독송(經典讀誦), 미륵칭명(彌勒稱名) 염불, 장엄(莊嚴) 정행(正行), 사홍서원(四弘誓願) 참회(懺悔) 등 10선(善)을 완전히 수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는 어디까지나 대중교화가 아니라 승려자신의 도솔천 상생을 위한 방법에 불과한 것이어서 그 신앙기반은 넓지는 못하였고 귀족적 성향이 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스승 해린의 경우도 실천과 대중교화보다는 교학을 중시하고 미륵과 아미타불을 예념한다는 면에서 비슷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법천사에는 신라 태현계 법상종의 전통을 이어 국가의 안녕을 축원하고 미륵보살이 수행하고 있는 도솔천 상생을 위한 미륵불 예념을 행하는 미륵전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사자추선(死者追善)을 위한 아미타전도 중요시설로 사원의 중앙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법천사 아미타전에 놓이기 위해 만들어진 무장명 광명대(戊子銘 光明臺), 현로(懸爐), 향완(香垸) 등은 이러한 신앙생활을 위한 용구였음을 보여준다.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

한편 지광국사현묘탑과 한쌍을 이루던 탑비는 원주 법천사 터에 남아있다. 지광국사현묘탑비는 국사 해린이 고려 문종 24년(1070)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현묘탑과 함께 세운 것이다. 옛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탑비는 높이 4.55m로 국보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귀부) 위로 몸돌(비신)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이수)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긴 수염이 달려 있고 부릅뜬 눈은 험상궂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王(왕)’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 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부드러운 필체로 썼다.

고려 선종2년(1085)에 세워진 작품으로, 거북등의 조각수법과 머릿돌의 모양이 새로운 것이 특징이다. 비 앞면 가장자리에 덩굴무늬를 새기고, 양 옆면에 정교한 용 조각을 한 치밀함이 돋보여 형태와 조각이 잘 어울리는 고려시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법천사지 당간지주

법천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는 현재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74-2번지에 자리해 있다. 1984년 6월 2일 문화재자료 제20호로 지정되었는데, 전체 높이는 3.9m로 과거 법천사지 절터였던 현재 원촌마을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석축을 쌓은 넓은 대지 중앙에 서있다.

절에서 의식을 행할 때 절 마당에 부처와 보살의 행적을 그린 당번(幢幡)을 높은 깃대에 다는데, 이 깃대를 고정시켜 주는 것이 바로 당간지주이다.

법천사지 당간지주는 양 지주가 서로 마주보고 동서로 서있으며 중형에 속한다. 표면에는 별다른 조각 꾸밈이 없으며 상단 안쪽에는 당간을 고정시켰던 장방형(長方形)의 간구(杆構)가 있고 그 외면은 부드러운 호형(弧形)을 이루고 있다.

당간을 받치던 원형의 간대(竿臺)가 원래의 위치인 양 지주 사이에 잘 남아 있으며, 중심에는 돌기가 있어 당간을 놓도록 되어 있다. 건립연대는 고려 전반기로 추정된다.

법천사지 당간지주에서 주목되는 것은 상단의 부드러운 곡선과 돌기로 이루어진 간대이다. 보존 상태는 좋으며 원형 그대로 원위치에 남아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지광국사 현묘탑비와의 거리를 헤아려보면 과거 법천사지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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