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사동 선사주거지와 원지동 지석묘
암사동 선사주거지와 원지동 지석묘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06.22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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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 문화유산 둘러보기’ 11] 한강유역①

한강이란 이름은 우리말의 큰 물줄기를 의미하는 ‘한가람’에서 유래되었다.

한’은 크다∙넓다∙가득하다∙바르다의 의미이며, ‘가람’은 강의 옛 이름이다. 그러므로 한강은 크고 넓으며 가득한 물이 흘러가는 강이라는 뜻이다.

한강은 시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중국의 한(漢)∙위(魏)나라에서는 ‘대수(帶水)’라 하였는데, 이는 한강의 모습이 한반도의 허리에 띠를 두른 것과 같음을 표현한 것이다. 고구려 광개토왕비에는 ‘아리수(阿利水)’로 표기되어 있으며, 백제에서는 ‘욱리하(郁里河)’라고도 하였다.

또《삼국사기》지리지(地理志)에는 ‘한산하(漢山河)’ 또는 ‘북독(北瀆)’이라 표기했으며, 고려 때에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흘러내리는 강이라는 뜻으로 ‘열수(洌水)’라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서울 부근의 한강을 가리켜 ‘경강(京江)’이라 하였다.

한강이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백제가 동진(東晋) 등 중국과 문물을 교류하면서 한자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된 후 ‘한수(漢水)’∙‘힌강(漢江)’으로 표기했고, 점차 옛 이름은 사라지고 한수∙한강∙한강수(漢江水) 등으로 불렸다.

백제 시대에 ‘한강’으로 불려

한강은 대한민국의 중부지역을 동에서 서로 유유히 흐른다. 따라서 한강은 선사시대 이래 한반도의 동해안과 서해안의 동∙서 문화를 하나로 잇는 동맥이 되었다. 즉 함경도의 분수령과 강원도의 진부령∙미시령∙한계령∙구룡령∙대관령∙두문령,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는 죽령∙조령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를 따라 관동∙영동의 문화가 서울의 문화를 접했던 것이다.

한강은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갈라진 한북정맥(漢北正脈)∙한남정맥(漢南正脈)을 나누는 선이 된다. 따라서 이 커다란 세 산줄기에 에워싸여 그 사이에 흐르는 크고 작은 물줄기에 의해 이루어진 한강유역은, 예로부터 민족문화 형성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특히 남한강과 북한강이 양수리에 만나 도도히 흐르는 한강 본류는 경강(京江)이라 불리는 대하(大河)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잉태했으며, 키우고 발전시켜 유구한 민족문화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하는 터전이 되었다.

이러한 서울의 경강지역은 북한산을 북으로 하고, 관악산을 남으로 하여 한강으로 허리띠를 매고 있는 형국이다. 즉 민족의 젖줄인 한강이 서울에 이르러 진산(鎭山)인 북한산과 북악∙낙산∙목멱산∙인왕산의 내4산(內四山), 그리고 조산(朝山)인 관악과 어우러져 명당수로 기능했다. 나아가 민족사의 중심무대가 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창조적 활동을 끊임없이 이어온 터전이었고, 오늘날 조상들의 삶의 흔적을 살필 수 있는 역사의 장이 되었다.

 

▲ 강동구 암사동 선사주거지. ⓒ문화재청 자료

 

인류의 정착생활을 통한 문화의 창조는 먼저 토지와 수리 이용을 통한 식량생산이 가능할 때 이루어진다. 아울러 이것은 인간이 모여 사는 취락의 형성 발달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서울지역의 역사와 문화는 한강이 주는 수리기능과 그 유역을 이루고 있는 식량생산의 토대인 경작지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나아가 서울지역은 교통과 외적으로부터의 방어, 예술 창조활동 등이 주민 생활공간과 어우러진, 문화적 삶의 형태를 총 망라한 역사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에서 보듯이 물의 이용이 편리한 강변에서 일찍이 취락 도시가 발달했다. 이것은 한강을 끼고 선사문화를 일으킨 서울지역의 지리적 조건과 일치된다. 즉, 물을 쉽게 이용할 수 있음으로써 인류의 초기 생산단계에 있어 보다 편의적이고 풍요로운 입지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산업도시가 되기 이전의 서울의 생업조건을 18세 중엽 간행된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의 기록을 통해 보면 “한양(漢陽)은 나라 안의 네 곳으로 압축할 수 있으리 만큼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곳으로, 길에 밥을 떨어뜨린다 해도 주어 먹을 정도로 흙 색깔이 정결하고 단단한 곳”이라 하였다.

이렇듯 서울지역의 산과 물은 주민들이 정착하여 생활할 수 있는 충분한 입지조건이었다. 또 한강유역 평야지대는 토지 생산력이 높아 인간생활에 알맞은 집의 대지와 경작지를 제공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을 바탕으로 서울지역은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의 생활터전이 되었고, 그 흔적으로 많은 문화유산을 남기고 있다.

▲ 암사동 선사유적지에 복원한 신석기 시대 움집. ⓒ문화재청 자료


서울 문명의 발상지, 선사유적들 

한강유역에 우리 조상들이 생활을 전개한 역사는 구석기 시대까지 올라간다. 특히 서울지역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된 것만도 면목동을 비롯하여 암사동∙가락동∙역삼동∙성동구 응봉 등 상당수에 이른다. 특히 한강의 지류인 중랑천과 연결되는 면목동 아차산 북사면 일대는 발굴작업에 의해 그 유구와 유물이 확인됐다. 그리고 남한강 일대에서도 구석기 유적이 발견됐다.

한강유역의 신석기 유적은 140여 곳에서 발견됐는데, 그 주거지∙패총 등 유적들은 한강 중류에 위치한 서울 부근과 북한강 유역의 춘천 부근에 집중되어 있으며, 다시 한강 하구의 여러 섬들에서 발견됐다.

▲ 신석기 시대 유적 빗살무늬토기. ⓒ문화재청 자료
이 가운데 서울지역의 신석기 유적으로 정식 발굴 조사된 암사동 선사주거지는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 문화로 대표되며, 그 인근의 미사리 유적과 함께 주목을 끈다. 약 6천년 전의 암사동 유적은 대동강 유역의 지탑리∙궁산리 유적과 함께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연구에 핵심적인 유적이다.

아울러 이 유적은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를 거쳐 백제문화층으로 이어진 곳으로 역사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따라서 한강 암사동 선사유적으로 대표되는 문화유적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가 나일강, 유프라테스강∙티그리스강, 인더스강∙갠지스강, 황하 등으로 말해지듯 한국 신석기 문명의 중심이자 서울 문명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신석기 문화는 어로∙채집∙수렵으로부터 점차 정착 원시농경과 목축에 의한 식량생산경제를 바탕으로 전개됐으며, 후기에 이르러 농경생활을 시작했다. 이러한 신석기 혁명은 강변을 무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인구의 증가와 취락의 형성으로 안정된 정착생활을 전개했다.

신석기 문화에 이어 기원전 10세기경 청동기 문화가 전개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청동기 문화는 무문토기(민토기)와 함께 전개되는데, 무문토기인들이 우리의 직접 조상으로 확인되고 있다.

한강유역의 청동기 문화가 발달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2~3세기까지로 보인다. 서울지역의 청동기 유적으로는 도곡동 매봉터널 위의 역삼동움집터, 가락동움집터, 가락동5호움집터∙가락동4호움집터∙응봉유적∙아차산유적 등이 있다.

특히 가락식 토기로 표현되는 청동기 시대의 무문토기문화는 한반도 동북지역 계통의 구멍무늬토기문화권과 서북계통의 팽이토기문화권을 중계∙혼합하여 서울지역의 통합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청동기 시대의 묘제인 지석묘는 거석문화의 하나로, 서울지역에서는 원지동∙양재동∙개포동∙고척동 등지에 산재되어 있었으며, 그 연장선상의 문화로 생각할 수 있는 강화도 지석묘군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러 그 문화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

이러한 한강유역의 청동기 시대 주거유적은 대부분 강변에서 약간 떨어진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지만 주위의 하천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생활용수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잡곡농경∙벼농사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발전했다.

아울러 벼농사의 시작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경제생활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주 흔암리 유적의 탄화된 쌀의 출토는 이를 입증하고 있다. 나아가 농경의 발달과 금속기의 사용은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고,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이 등장하여 정치조직을 형성하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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