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弘法國師實相塔)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弘法國師實相塔)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5.1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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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 39]

▲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 [나각순 제공]
정토사(淨土寺) 홍법국사실상탑(弘法國師實相塔)은 고려시대의 고승 홍법(弘法, ?~1017) 국사(國師)의 부도탑으로,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02호로 지정되었다.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은 본래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하실마을 정토사지에 있던 것을 1915년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경복궁으로 옮겼다.

다시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을 용산구 용산동6가 168-6번지로 이전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 남쪽 외곽에 옮겨져 자리하고 있다. 재료는 화강암으로 높이는 2.55m이다. 그리고 하실마을 북쪽에 위치한 옥녀봉(710.5m) 남쪽 끝자락에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비가 있던 터가 있다.

정토사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창건된 사찰로, 정토산 아래에서 1983년부터 1984년 발굴 때 고려 전기와 조선 전기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淨土寺(정토사)’와 ‘開天寺(개천사)’라고 쓰인 명문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이 정토사가 있던 자리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1530년대에 개천사로 불렸으며 고려 역대 왕조의 실록을 보관하였던 곳으로 되어있다. 즉 “개천사는 정토산에 있다.

고려 역대 왕조의 실록을 처음에는 합천 해인사에 간직했다가 왜구로 인하여 선산(善山) 득익사(得益寺)에 옮기고, 또 이 절에 옮겼다.

또 죽주(竹州) 칠장사(七長寺)에 옮겼다가, 공양왕 2년(1390)에 그 땅이 바다에 가까워서 왜구가 쉽게 이를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이 절에 간직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세종 때에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기 위하여 모두 서울로 운반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 정토사가 있던 자리는 충주댐 공사로 수몰되어 주춧돌 일부와 신방석(信防石: 대문의 기둥 밑에 좌우로 받친 돌) 등을 주변 지역으로 옮겨 정비하였다.

현재 정토사지에는 보물 제17호 정토사 법경대사자등탑비(法鏡大師慈燈塔碑)가 남아 있다. 그리고 이곳에 있던 국보 제102호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과 보물 제359호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전시되고 있다.

이렇게 정토사는 고려 역대 왕조의 실록을 봉안하였던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며, 경복궁으로 옮겨진 탑과 탑비는 물론 남아있는 탑비와 더불어 우리 불교미술사에서 양식상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정토사은 고려 태조로부터 국사의 예우를 받았던 법경(法鏡) 현휘(玄暉, 879~941)가 많은 제자를 양성한 뒤 입적한 곳이다. 그리고 홍법국사가 현휘의 뒤를 이어 주석하였으며, 이후 조선시대 초기까지 법등을 이어왔던 대찰이었다.

홍법국사는 중국 당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선(禪)을 유행시켰으며, 고려 성종 때 대선사(大禪師)를 지냈고 목종 때 ‘국사’의 칭호를 받았다.

이 부도탑은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고 일부에 새로운 변형을 꾀한 작품이어서 그 독특한 조형이 주목된다. 부도탑의 구성은 지대석․기단부․탑신․옥개석 등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팔각으로 이루어진 기단부를 놓았다. 기단부 중에서 맨 아래에 위치한 하단 팔각 기대석은 각 면 중간에 각대(角帶)를 돌려 상하 두 부분으로 구획하였는데, 아래 부분는 표면이 떨어져 나갔지만 남은 흔적으로 보아 8엽(葉)의 복판(複瓣) 연화문을 장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윗부분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기대석 윗면은 평평하게 해놓고 기단석 상단 아래쪽에 가깝게 각형(角形)․원호(圓弧)․각형의 차례로 마련된 3단의 낮은 굄을 두었다. 이러한 3단의 굄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갑석 등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있다.

굄 위에는 16엽의 복판 연화문을 장식한 하대석을 얹었는데, 연화문 역시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복련석의 각 모서리에는 위로 솟은 귀꽃을 조각하였다. 그 윗면에는 높직한 3단의 굄대를 마련하였는데, 지대석과 마찬가지로 각형․원호․각형 등으로 이루어졌다.

팔각 중대석의 각 면에는 사각형에 가까운 고려시대 특유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었는데, 안상 안에는 구름 속에서 노니는 용의 모습과 꽃모양 등이 화려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상대석은 비교적 얇고 원형에 가까우며, 밑에는 앙련을 조각하였고 연판 안에는 다시 꽃문양을 장식하였다. 상대석 윗면에는 둘레언저리를 따라 나지막하게 팔각 단이 형성되어 있고, 그 위에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은 이 부도에서 가장 특징 있는 부분으로, 원구형(圓球形)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이 탑을 ‘알독’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탑신의 중앙 높이에서 두 줄의 양각선이 가로로 둘려졌고, 다시 탑신 윗면에서 두 줄의 선이 내려와 밑에까지 이어지는데, 탑신 중앙부에서 가로 선과 세로 선이 만나는 교차점에 꽃모양을 새겨 매듭으로 장식하여 단조로운 표면에 변화를 주었다. 이러한 원구형 탑신은 인도(印度)에서 나타난 원구형 사리기(舍利器)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탑신의 꼭대기에는 기단부 복련석과 마찬가지로 16엽의 복판 복련이 장식되어 그 위의 작은 옥신석을 받고 있다. 옥신석은 원통 모양으로 생겼고, 주위에 비천(飛天)이 조각되었다.

옥개석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으나 팔각 귀퉁이에 귀꽃이 있어 주목된다. 현재는 대부분 없어졌지만 본래는 전각(轉角)마다 높직한 귀꽃을 달았는데 그 모양은 마치 큼직한 수막새와도 같아서 다른 부도에서 보이는 귀꽃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이 부도의 특징이다.

옥개석 밑면은 삿갓 모양으로 깊숙이 패여 옥신석 위에 얹혀 있다. 옥개석 위의 상륜부는 아무런 부재도 남아 있지 않다.

이 부도탑은 전체적 구성에서는 팔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신라 말의 팔각원당형 부도 형식을 이어받고 있으면서도 일부분에서 새로운 변형을 보여준 작품으로, 제작 연대는 홍법국사가 입적한 고려 현종 8년(1017) 이후로 추정된다.

법경대사 현휘(879∼941)는 신라 말 구산문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선풍을 계승하였으며, 속성은 남원 이씨이다. 영각산사(靈覺山寺) 심광(深光)에게 출가하여, 효공왕 2년(898) 해인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잠시 무주에 머물렀다.

906년 당나라에 가서 구봉산(九峰山) 도건(道乾)의 문하에서 참선한 지 10여일 만에 심요(心要)를 받았다. 10여 년 동안 중국의 각지를 두루 편력하다가 고려가 건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태조 7년(924)에 귀국하였다.

태조 왕건은 사신을 교외에 보내어 영접하고, 곧 궁중으로 맞아들여 국사의 대우를 하였다. 태조의 청에 의하여 중주(中州, 충주) 정토사에 머물렀는데,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쳐 명성을 떨쳤고 941년에 입적하였다.

944년에 최언위(崔彦撝)가 찬한 탑비를 세웠는데, 현재 정토사 터에 남아 있다. 제자로는 활행(闊行) 등 300여 명이 있으며, 태조 왕건과 충주지방 호족들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으며, 중원부의 승려와 주민들이 거의 귀의하고 숭앙하였다.

이를 증명해주는 것으로 비음기(碑陰記)에 홍림(弘琳) 대덕(大德), 경부(景孚) 대통(大統), 훈예화상(訓刈和尙) 등 9명의 승려와 유권열(劉權說)·견서(堅書)·준홍(俊弘) 등 40여명의 지방호족이 명기되어 있다. 탑호는 자등(慈燈)이다.

홍법국사는 고려 전기 충청북도 충주에서 활동한 승려로서, 그의 탑비문을 통하여 그 생애의 일부를 어느 정도 확인해 볼 수는 있다. 판독이 가능한 부분만으로 출생 연도를 추정해보면 대략 통일신라 말 신덕왕(神德王) 때인 912년에서 916년 사이인 것으로 보인다.

출가 시기는 12세 때로 보이며, 태조 13년(930)에 수계했다고 한데서 그가 활동하던 무렵에 보통 승려들이 출가에서 수계하기까지 걸리는 년 수가 3~6년이었던 것과 견주어 그의 출가 시기도 대략 921~927년 사이로 보인다.

고려 태조는 관단사원(官壇寺院)을 설치하여 구족계의 수계를 국가 차원에서 관장하였는데, 그 첫 번째 사례가 홍법국사의 경우로 추정된다.

이는 탑비에 홍법국사가 930년에 마가갑사(摩訶岬寺) 계단(戒壇)에서 수계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이해된다. 마가갑사는 개경의 진산인 오관산(五冠山)에 소재한 사찰이었는데, 개경의 진산에 문을 연 사찰이라면 태조에 의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찰이기 때문이다.

또 홍법국사는 화양(華壤, 중국)에 가서 유학할 것을 결심하고, 입조사(入朝使)인 시랑 현신(玄信)의 배에 편승하여 중국으로 유학하였다. 때는 935년경으로 절강 지방에서 복건성 지방으로 구도 여행이 계속 이어졌다.

귀국 후 홍법국사는 개경의 보리사와 봉은사 등의 사찰에서 홍법 전도에 전념하였다. 홍법국사의 승계는 대선사였다. 대선사는 선종 승려의 최고 직위였으며 홍법국사가 대선사가 된 것은 성종 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홍법국사가 봉은사에서 활동했던 시기도 목종 때 국사에 책봉된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홍법국사는 정토사를 하산소로 삼아 만년을 보내다가 목종 때 가부좌를 맺고 앉은 채 입적하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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