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위례성과 삼국의 한강 쟁패전
백제 위례성과 삼국의 한강 쟁패전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07.05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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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 문화유산 둘러보기’ 12] 한강유역②

해방 전후 실증주의사학을 대표하던 이병도(李丙燾)는 1950년대에 “한강유역을 확보하는 자가 한반도를 제패했다”고 주장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물론 이보다 앞서 한강의 중요성은 고래로부터 위정자나 지식인들이 지속적으로 거론해 왔다. 이는 한강유역이 고대의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이 국력을 키워 영토를 확장시키면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었던 역사의 장이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 한강 성내천 남쪽에 위치한 백제 전기 유적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성의 성격을 놓고 백제 위례성 설과 방어용 성이란 두 견해가 있다. ⓒ문화재청 자료

삼국이 서로 차지하고자 했던 한강의 중심에는 백제의 위례성이 존재했다.
위례성은 고대국가의 도읍지로서 오늘날 서울지역과 같은 지위로 그 중요성이 강조됐다. 위례성을 중심으로 한 한강유역은 경제∙군사∙문화∙대외관계 면에서 통일된 국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위례성을 중심으로 한 고대 서울의 역사와 문화는 한강이 주는 수리(水利) 기능과 그 유역을 이루고 있는 농업 경작지를 배경으로 한 경제적 토대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한강유역의 풍부한 수량과 오늘날 김포평야, 여주∙이천평야, 평택평야 등 넓은 충적평야는 고구려∙신라의 세력 확장과 유지에 따른 경제적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탐낼 만한 땅이었다.

또한 한강은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 전국의 물산을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많이 집산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고대 이후 전근대사회에서는 조운(漕運)∙수운(水運)의 중심지였고, 육로 또한 이와 연결됐다. 그리고 큰 물줄기로서의 한강은 외적 방어에 유리한 천연의 장애물이었으며, 수동식 무기를 이용하던 전쟁에서는 관방(關防) 기능의 효용이 가장 뛰어난 자연조건이었다.

이러한 한강의 여러 역할은 농업 생산력을 통한 경제적 안정, 군사 방어의 효용성 제고, 문화의 수용과 전파, 물자교류와 외교통상의 확대 등에 기여했다. 따라서 삼국은 정치적 통일을 꾀하고 강력한 영역국가를 완성하고자 한강유역의 확보를 위해 필사적인 쟁패전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 백제 전기 무덤들인 방이동 고분군(사적 제270호). 가락동·석촌동 무덤과 함께 백제의 유적지로 꼽힌다. ⓒ문화재청 자료

‘한강’은 한반도 제패의 요충지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하여 국가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던 삼국은 그들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국세를 펼쳐나갔다. 압록강 중류 집안(集安)에서 성장한 고구려는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남진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한강유역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형산강 유역의 경주평야에서 성장한 신라는 낙동강유역을 장악하고 백두대간을 넘어 남한강을 따라 진출방향을 설정했다.

그러나 일찍이 한강유역에 정착하여 고대국가를 이룩했던 백제는 경기∙충청∙전라∙강원 일부를 영토로 하는 영역국가로 성장했지만,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고구려와 신라의 팽창세력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제는 한강유역의 지리적 여건과 철기농경문화의 높은 생산력을 바탕으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3세기 고이왕 때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남당(南堂) 정치를 행하였다. 나아가 4세기 후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때에는 정복사업을 활발하게 펼쳐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391년 7월에 직접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여 아리수(阿利水, 한강)를 건너 백제의 도읍인 한성(漢城)에 육박했으며, 백제의 항복을 받고 돌아갔다.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은 427년에 도읍을 집안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한강유역 경략을 추진했다. 이때 고구려는 서울지역의 한강유역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고, 남평양(南平壤)이라는 별도(別都)를 두었다.

백제 성왕은 538년 사비 천도와 더불어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국가체제를 강화했으며, 551년 신라 진흥왕과 더불어 공동작전을 펴 한강유역의 고구려 군사를 물리치고 한강유역을 탈환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2년 후에는 신라가 백제세력을 한강유역에서 물리치고 한강 하류를 장악했으며, 삼국통일 거점을 확보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 백제 석촌동 적석총(사적 제243호) 제 3․4호분. ⓒ문화재청 자료

한편, 신라가 당나라 군사를 축출한 마지막 격전지가 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파주∙연천∙포천∙양주 일대로서 칠중성 전투와 매초성 전투가 있었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확보하여 당나라와 연합전선을 꾀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했으며 나아가 이 지역에서 외세로서의 당나라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우리 역사상 최초의 통일된 민족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렇듯 한강유역의 득실은 삼국의 흥망성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 지정학적 위치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절대적인 것이었다. 즉 한강유역은 한국 민족사에 최종적인 통합세력을 출산∙유지하는 역사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삼국문화를 아우르면서 통일된 민족문화를 이루게 하였고, 이후 통일된 정치체제에 따라 한민족(韓民族)의 고유한 단일문화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통일신라 때는 한산주 설치

한편, 통일신라시대의 한강유역은 일선 군사지휘권자가 통치를 겸하던 군사행정구역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어 통치하는 민사행정구역으로 변하였다. 삼국통일 후 한강유역에는 한산주(漢山州)가 설치됐고, 군영으로 한산주서(漢山州誓)와 남천정(南川停)∙골내근정(骨乃斤停)이 있었다.

신라의 통치권이 아직 대동강 이남 임진강 북쪽에 미치지 못하고 당나라∙발해와의 사이에서 완충지대로 있던 상황에서 한산주는 변방지대로 군정에 의해 지방행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점차 민정이 회복되면서 757년 한산주가 한주(漢州)로 개칭됐고, 지금의 서울지역에는 한양군(漢陽郡)이 설치되어 태수(太守)와 소수(少守)의 지방장관이 다스렸다.

이후 신라의 실질적인 영역이 대동강유역까지 확대됨으로써 한양군은 변방의 군사적 성격을 벗어났다. 즉 선덕왕 3년(782년)에 황해도 일대 패강진(浿江鎭)이라는 군사행정구역이 설치됨으로써 한양군은 이제 군사기지에서 명실공히 민사행정구역으로 편제됐다.

한편, 한양군의 역사지리적 중요성은, 신라 하대에 김헌창의 웅진반란에 이어 그의 아들 김범문이 반란을 일으켜 여주 등 한강 일대의 세력을 규합하여 서울지역에 도읍을 정하고자 북한산성을 도모한 사건을 통해 증명된다. 이러한 김헌창 부자의 반란은 신라 하대 지방세력의 출현을 예고한 것이며, 급기야 9세기 말 지방호족세력을 재편성한 후삼국사회가 형성된다.

▲ 백제 석촌동 적석총(사적 제243호) 제 3․4호분. ⓒ문화재청 자료

한강변 호족의 등장과 남경 경영

898년 궁예의 휘하인 왕건이 한강유역인 양주와 견주지역을 공략하고 패서도와 한주 관할의 30여성을 장악하니, 한강유역의 서울지역은 궁예의 세력권에 들게 되었다. 이어 918년 왕건이 국왕에 추대되어 고려왕조를 개창함에 따라 한양군은 고려에 편입되어 940년에 한강 이북의 한양군은 양주(楊州), 한강 이남의 한주는 광주(廣州)로 개편됐다.

이러한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은 왕건세력이 한강유역의 유리한 지역을 차지했다는 지정학적 기반에 힘입은 바 크다. 즉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한강유역의 호족세력들은 대부분 왕건에 협조하여 이후 고려의 중추적인 귀족세력으로 성장했다.

왕규의 광주 왕씨를 비롯하여, 서희의 이천 서씨, 강감찬의 금천 강씨, 윤관의 파평 윤씨, 이자연∙이자겸의 인주 이씨, 허경∙허재의 공암 허씨 등 대표적인 문벌귀족이 형성됐으며, 한양 조씨∙ 한양 한씨∙양주 송씨∙행주 기씨 등 번성했다.

고려시대 서울지역은 국초에는 양주,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으로 불리었다. 983년 전국에 12목이 설치되면서 한강유역 이북은 양주목, 이남은 광주목이 관할하게 되었다.

특히 문종 21년(1067년) 양주에 서경∙동경과 더불어 3경의 하나인 남경이 설치되어 서울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물론 남경의 정치∙경제∙군사적 중요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보다 민심 수습을 위한 지리도참사상에 일치한 남경의 역사지리적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참사상에 따른 길조가 나타나지 않자 남경은 약 10년 만에 폐지되고, 숙종 때 다시 재건되어 북악산 아래 오늘날 청와대가 점하고 있는 터에 연흥전․천수전 등 궁궐이 신축됐다.

한편, 1308년 충선왕이 관제개혁에 따라 남경을 한양부로 개편하면서 단순한 지방도시로 변모했다. 따라서 한양부는 고양∙양주∙포천 등 현재의 한강 이북 서울지역과 그 주변 일대만 관할하게 되었다. 아울러 왕의 순행과 어의(御衣) 안치 등 정치적 중요성은 사라지고, 개경과 가깝기 때문에 국왕의 놀이와 사냥터가 되었다. 예를 들면 충숙왕은 한양에 가서 사냥을 하고, 그 12년에는 조국공주(曹國公主)와 더불어 한강변 용산에 놀러 와서 행궁에서 왕자를 낳으니, 이가 용산원자이다.

이렇듯 한양부는 남경 때의 국가 융성을 위한 순행처가 아니라 단순한 휴양지로 변모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의 자주적 개혁정치에 따른 배원정책(背元政策) 실시와 관제(官制) 환원으로서 남경이 부활되기도 했으며, 왜구의 창궐에 따른 천도 움직임으로 한강유역의 서울지역 중요성이 다시 확인됐다.

즉 우왕 9년과 공양왕 2년의 한양천도 6개월씩의 경험은 조선왕조의 한양천도로 확고하게 나타났다. 이는 풍수지리적으로나 군사∙사회경제적으로 한강을 터전으로 한 한양의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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