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전(傳)흥법사 염거화상탑(廉居和尙塔)
원주 전(傳)흥법사 염거화상탑(廉居和尙塔)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5.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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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 40]

▲ 원주 (전)흥법사 염거화상탑-1. [나각순 제공]
전 흥법사(興法寺) 염거화상탑(廉居和尙塔)은 통일신라 말기의 고승 염거화상의 부도탑으로,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문성왕 6년(844)에 세워졌으며 높이 1.7m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이 탑은 본래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터에 있었다고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다. 원래 위치에서 여러 차례 옮겨졌는데, 1914년에 탑골공원으로 옮겨진 것은 확실하며, 다시 경복궁 뜰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일본인 호사가에 의해 원래 위치에서 옮겨올 때, 해체되면서 《금동탑지(金銅塔誌)》가 발견되어 떠돌다가 1919년 총독부박물관에서 이 탑지를 구입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탑지로 부도탑의 축조 연대를 알게 되었다. 이 《금동탑지》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염거화상탑이 1914년 원위치에서 서울의 탑골공원으로 어떻게 옮겨졌는지, 《금동탑지》가 누구를 통해 어떤 경로로 구입된 것인지, 또 어떻게 경복궁내로 옮겨졌다 용산박물관으로 다시 옮겨졌는지 기록이 없다. 이러한 의문이 밝혀지고 원위치가 확인되면 사료적 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우리나라 각지에서 발견된 부도탑 가운데 만들어진 연대가 가장 오랜 탑지(塔誌)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이 부도탑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즉 주인공인 염거화상의 부도임을 증명하는 동판에 새긴 탑지가 발견 되어 탑이 마련된 연대를 알게 된 것인데, 통일신라 문성왕 6년(844) 염거화상이 세상을 떠난 후 마련됐음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이후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을 용산구 용산동6가 168-6번지로 이전하면서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의 남쪽 외곽 야외전시장에 옮겨져 자리하고 있다.

신라에서 고려에 걸쳐 고승의 사리탑 양식은 이른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라 하는 것으로 현재 전하는 사리탑 중에서 연대가 확실한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후 대부분의 팔각원당형 사리탑이 이 양식을 따르고 있어 그 최초의 작품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아울러 최초의 양식이라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 원주 (전)흥법사 염거화상탑-2. [나각순 제공]
이 부도탑은 상하 각부의 모든 부재의 평면이 팔각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1층의 형태를 띠고, 기단부 위에 탑신(塔身)을 놓고,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을 얹었으며, 정상에 상륜부(相輪部)가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기단 아래에 사각형 지대석(地臺石)이 있으나 나중에 만들어 넣은 것이라서 본래의 형태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부처님 사리를 모시는 탑은 3층 이상의 석탑이나 전탑 또는 다보탑처럼 특수한 형태의 탑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고승의 사리탑은 한결같이 1층이었는데, 표면에 전체적으로 문양을 새겨 화려하게 함으로써 차별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염거화상탑의 상하 각부는 8각을 기본으로 삼았고, 기단은 상․중․하대석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대석 각 면에는 사자(獅子)를 양각(陽刻)으로 새겼는데 모두 자세가 다르며, 얕은 간석(竿石)에는 안상(眼象) 안에 향로 등을 조각하고 2중으로 연꽃문양을 조각한 상대석을 얹었다.

하대석 윗면에는 중대석을 받치는 3단의 굄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다소 낮은 듯이 보이는 중대석에는 안상(眼象)을 새기고 연(輦)․향로․화문(花紋) 등을 새겼는데, 특히 연은 연좌(蓮座), 보개(寶蓋), 보주(寶珠), 화문 등이 장식되어 화려하다.

상대석은 아래, 위의 두 면으로 구성되었는데, 아랫면에 팔각으로 된 각형(角形) 받침을 내어 윗면에 마련한 중대석의 괴임대와 대칭을 이루게 하였다.

▲ 염거화상 탑 안내문. [나각순 제공]
아랫면의 옆은 앙련(仰蓮)을 이중으로 마련하여 매우 화려하다. 윗면에는 가장자리에 둥근 괴임을 돌리고, 그 중앙에 다시 2단의 괴임을 두었다.

상대석 위에는 높직한 탑신받침(팔각굄돌)을 마련하였으며, 그 8면에는 다시 안상을 두고 안에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천부상(天部像) 1구씩을 양각하였다.

사리를 모셔둔 탑신은 목조건축을 그대로 형상화하였기 때문에 지붕 등에서 깊게 패인 기왓골, 기와의 끝마다 새겨진 막새기와의 모양, 밑면의 연목(椽木, 서까래) 등 목조건축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탑신 각 면 좌우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우주(隅柱)를 새겼으며, 앞과 뒷면에 문비(門扉)를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문고리 두 개씩을 양각하였다. 또한 문비 양쪽에는 각각 사천왕(四天王)을 새겨서 사리를 지키는 모습을 나타냈다. 머리 뒤로 두광(頭光)을 갖추고 갑옷을 입었으며 무기를 손에 쥔 사천왕상은 매우 사실적이다.

탑신 위에 놓인 옥개석(屋蓋石)은 밑면에 1단의 각형 받침을 새기고, 그 위 처마 아래에는 비천상(飛天像)을 한 면씩 건너서 네 면에 양각으로 새겼다. 옥개 윗면은 우동형(隅棟形)을 표시하고, 우동 끝에 잡상(雜像)을 배치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처마 아래 낙수면(落水面)에는 기왓골을 나타내었다.

옥개석 윗면에는 팔각으로 높다랗게 각형 괴임을 마련하여 상륜부를 받도록 하였다. 현재 상륜부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1920년대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옥개석 위에 복발(覆鉢) 1석과 보륜(寶輪) 2석으로 된 상륜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부도탑은 비록 다른 팔각원당형 부도에 비하여 규모는 크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우아한 기품과 소박한 조각 솜씨를 보이고 있으며 세부의 조각도 아름답고 청아하다.

▲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 [나각순 제공]
염거화상은 9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개조(開祖) 도의(道義)의 제자로,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며 선(禪)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체징(體澄)에게 그 맥을 전하여 가지산문이 크게 융성하게 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도의선사는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신라에 선불교를 전파하는데 당시 신라사회의 정신적인 이념이었던 교종으로부터 심한 배척을 받아 신라 중심 사회에 전파하지 못하고 설악산 진전사로 들어가 40여 년을 칩거하면서 염거화상에게 전수하고 타계한다.

한편 염거화상으로 선맥을 이은 보조(普照) 체징(體澄) 역시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왕명으로 가지산사(迦智山寺)에서 포교하였다. 이 가지산사가 가지산문의 본사가 된 보림사(寶林寺)라고 알려져 있는데, 도의으로부터 염거, 보조로 이어진 선종의 맥은 우리나라 선맥(禪脈)의 원조가 되었다. 그 선맥이 오늘날에 이어져 한국불교의 기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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