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흥청망청’ 유래한 경복궁 경회루
연산군의 ‘흥청망청’ 유래한 경복궁 경회루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9.0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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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50]
▲경회루 전경. 오른쪽 뒤에 하향정이 보인다.

경복궁(景福宮) 경회루(慶會樓)는 조선시대에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었다. 따라서 ‘경회(慶會)’라는 이름의 뜻은 ‘경사스런 연회’라는 것으로 건물과 사용처가 일치하는 것이다.

원래의 경회루는 경복궁 창건 당시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작은 누각이었는데,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고 건물도 다시 크게 짓도록 명하여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이 완성 창건되었다. 그 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돌기둥만 270여년 남았던 것을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중창할 때 재건하였으나 옛날처럼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는 장엄은 베풀지 못하였다.

즉, 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4년 4월 20일에 새로 지은 석조기간 위에 목조로 세워진 건물로서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 이익공계 팔작지붕의 장엄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재건 후 130여년이 지난 1999년 지붕 일부를 해체 수리하였다.

경회루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경복궁의 편전(便殿)인 사정전(思政殿)과 천추전(千秋殿)의 서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경회루는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가 되는 인공으로 만든 커다란 사각형 연못인 방지(方池) 안 동쪽에 치우쳐 있는 네모난 섬 위에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다.

경회루 서쪽으로 있는 네모난 섬 두 개는 신선이 사는 이상향이다. 즉, 방장산?봉래산?영주산이 되어 벽오동이 심어지고 봉황이 깃들며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던 동산인 것인데, 지금은 우리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어 한국인의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경회루는 둘레를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아 기단을 삼은 네모반듯한 섬 위에 세워졌다. 건물 아래층의 바닥은 네모난 전돌을 깔았으며, 위층 바닥은 장귀틀과 결합하는 동귀틀이 각 칸에 하나로 구성된 장판자를 깔았다.

이렇게 섬 위에 건축된 경회루는 세 벌로 조성된 돌다리를 통하여 연결되는데, 남쪽의 것이 임금을 위한 다리다. 다리의 돌난간과 네 귀는 짐승 모양의 조각으로 장식되었고, 섬을 이루는 돌 기단 둘레에도 돌난간이 둘러있고, 모퉁이마다 돌로 조각한 12지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돌난간은 하엽동자(荷葉童子)와 팔각의 돌란대로 구성되었다. 기단의 서쪽으로는 계단을 두어 연못에서 배를 탈 수 있도록 하였다. 아울러 경회루에는 1868년에 동?북?서 세 방향으로 담장을 둘렀으며, 동쪽의 세벌 돌다리와 이어진 곳에 자시문(資始門, 만물의 생성이 건원(乾元, 주역의 건괘)에 의뢰하여 시작함), 함홍문(含弘門, 含弘光大에서 유래. 포용하고 너그러움. 주역의 곤괘)?이견문(利見門, 利見大人에서 유래. 지위가 없는 아래의 대인을 만나봄이 이로움)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북쪽 담장에는 필관문(必觀門, 觀水有術 必觀其瀾에서 유래. 반드시 그 여울목-水源-을  살핀다.)을 내었다. 그리고 서쪽 담장에는 만시문(萬始門, 萬物資始에서 유래. 만물이 의뢰하여 비롯한다.)을 설치하였다.

건물 동쪽과 서쪽에는 아래층에서 위층에 오르내릴 수 있게 계단을 두었다. 1층 천장과 2층 마루의 귀틀 밑 부분은 소란우물천장을 꾸미고 화려하게 단청해 놓았다. 한편 임진왜란 전의 경회루는 유득공(柳得恭)의 <춘성유기(春城遊記)>에 “남아 있는 경회루의 돌기둥은 그 높이가 세 길이나 되고 모두 마흔 여덟 개인데…”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흥선대원군 때 다시 지은 경회루와 같은 규모인 정면 7칸, 측면 5칸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경회루 1층 부분은 민흘림을 한 높은 사각 돌기둥이 외부 둘레에, 원형의 돌기둥이 내부에 배열되어 있고, 2층 부분은 나무기둥으로 조영되어 있다. 1?2층 바닥에는 모두 건물 공간 사용의 위계를 표시하기 위해, 바깥보다 안쪽의 바닥을 조금씩 높였고, 2층에서는 중앙부분의 바닥을 더 높여서, 외진-내진-내내진(內內陣)으로 공간을 형성하였다.

2층의 세 공간 사이에는 분합문(分閤門)을 달아 공간의 위계를 명확히 했고, 필요에 따라 들어 올려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토록 했으며, 상부에는 광창을 달았다. 현재 내진과 내내진 사이에 문은 없고, 그 흔적으로 문선만 있다.

2층 둘레로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설치했고, 기둥과 창방 아래 부분에는 당초문의 화려한 낙양각을 달았다. 이 곳 2층에서는 북쪽으로 백악(북악산), 서쪽으로 인왕산, 남쪽으로 목멱산(남산)을 멀리 볼 수 있어서 이곳이 자연과 함께 하며 연회를 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2층 상부의 가구형식은 11량 구조로 복잡하게 구성되었지만, 치밀하고 합리적으로 결구되어 있다. 공포는 출목이 없는 이익공이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을 얹어서 하중을 균등하게 분포시켰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내부 공간의 규모에 비해서 매우 거대하다.

팔작지붕의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용마루는 모두 회반죽을 바른 양성을 하였는데,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를,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만나는 부분에는 용두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와 잡상을 배열하였다.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설치했으며, 지붕 합각면에는 풍판과 쫄대를 사용하여 판벽을 구성하였다.

고종 때 재건된 경회루는 당시 유가(儒家)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건설되었는데, 그 내용은 정학순(丁學洵)이 경복궁 중건 후인 1865년에 쓴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에 다음과 같이 잘 기록되어 있다. 1층 내부 기둥을 원기둥(圓柱), 외부 기둥을 사각기둥(方柱)으로 한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나타낸다.

2층 기둥은 외진주(外陣柱, 바깥기둥)만 사각기둥이고, 내진주(內陣柱)는 모두 원기둥이다. 외진-내진-내내진 3겹으로 구성된 2층 평면의 제일 안인 내내진은 세 칸으로 이루어져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징하고, 이 세 칸을 둘러싼 여덟 기둥은 천지 만물이 생성되는 기본인 《주역(周易)》의 건(乾, 하늘)·태(兌, 비와 이슬)·이(離, 불)·진(震, 우레)·손(巽, 바람)·감(坎, 물)·간(艮, 산)·곤(坤, 땅)의 팔괘(八卦)를 상징한다.

제일 안 세 칸을 둘러싼 다음 겹인 내진은 12칸인데 1년 12달을 상징하고, 매 칸마다 네 짝씩 16칸에 달린 64문짝은 64괘(卦, 8괘를 겹쳐서 만든 괘)를 상징한다. 가장 바깥을 둘러싼 24칸은 1년 24절기와 24방위(方位)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경회루는 당시 유가(儒家)의 세계관과 자연관을 건축 형식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또 정학순은 경회루에는 불을 잡아먹는 짐승인 불가사리 둘을 금속으로 제작하여 방지 속에 넣어 화기(火氣)를 막으려고 했다는 것을 기록하였는데, 이 상징물 하나가 최근 경회루 연못의 물을 빼고 청소 정리하면서 나왔다.

그리고 연못 서북쪽으로 돌기둥 두 개가 물속에 담겨져 있는 육각형 평면의 하향정(荷香亭, ‘연꽃 향’이란 뜻)이 있다. 이는 <북궐도형>이나 《궁궐지》에 나타나지 않으며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지어졌다고 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경회루 현판 글씨는 건립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讓寧大君, 태종의 장남으로 세종의 맏형)이 썼다고 전한다. 그런데 지금의 현판은 고종 4년(1867) 경회루가 중건되면서 신관호(申觀浩)가 썼다. 여기서 ‘樓’자는 옛 서체를 따랐기 때문에 정자체와는 차이다 난다. 그리고 중건 때 경회루 상량문의 정기세(鄭基世)가 썼다.(《고종실록》 권4 고종 4년 3월 27일 신사조)

한편 경회루의 연못과 관련하여 연산군의 놀이터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연산군 말기에 조선의 국악과 춤을 관장하던 장악원(掌樂院)을 대신하여 연방원(聯芳院)을 설치하고, 전국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모아 관기(官妓)를 삼아 춤과 노래를 가르쳤다고 한다.

여기서 배출된 관기 가운데 재주가 뛰어나고 미모가 출중한 제1의 기예집단을 흥청(興淸)이라 하고, 다음을 운평(運平)이라 하였다. 이때 연산군은 이곳 경회루 연못에 배를 띄우고 이들을 불러 주지육림의 놀이판을 벌였다고 한다. 여기서 연산군이 흥청과 놀다가 망했다는 뜻으로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또 중종 32년(1537) 명나라 사신 공용경(?用卿)이 조선에 왔을 때, 중종은 그를 경회루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왕은 손님을 최선으로 접객하는 풍습에 따라 사신에게 주산인 백악과 서쪽의 인왕산의 이름을 지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공용경은 북쪽의 백악을 ‘공극(拱極)’이라 하고 인왕산을 ‘필운(弼雲)’이라 하였다. 공극은 ‘북쪽을 끼고 있다’ 있다는 뜻으로 북극성의 자리를 나타내는 의미로 산이 도성의 북쪽에 있어 주인 산이 되었던 연유에서 붙여진 것이다. 그리고 필운은 ‘우필운룡(右弼雲龍)’에서 따온 것으로, 운룡이란 용이 임금을 뜻하는 상징하는 것으로 임금을 보필할 때 오른쪽에서 한다는 뜻이다.

경복궁의 정전이 근정전과 경회루가 남쪽을 향해 있어 인왕산은 오른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것이다.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건물이다.

이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물속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건물이 잘 견디게 처리한 점, 거대한 건물을 이익공의 간결한 법식으로 처리하면서도 왕실의 연회장소로 합당하게 잘 치장한 점, 2층 누에서 주변 경관을 인왕산, 북악산, 남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게 처리한 점, 1층 건물 주변을 돌며 네모진 못(方池)의 물과 섬(當洲)의 수목을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점, 그리고 배를 띄우고 풍류를 즐길 수 있도록 한 점 등은 높이 평가되어 국보(國寶)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경회루 동쪽 담장과 돌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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