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역사공원'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역사공원'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9.27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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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 51]

사육신 역사공원은 조선왕조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세조 2년(1456) 목숨을 바친 6명의 신하들의 묘역이다.

지금은 7기의 봉분이 마련되어 있다. 동작구 노량진동 185-2번지 지하철1호선 노량진역에서 한강대교 방향으로 약 500m 떨어진 도로 북쪽에 위치해 있다. 조선 세조·숙종 시기에 조성된 묘역은 현재 사육신 역사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보호면적 9370평에 7기의 봉분과 부속 건물을 포괄하여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사육신 역사공원은 1978년 서울특별시에서는 이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영혼을 위로하고 그 정신을 널리 현창하고자 3240평이었던 묘역을 9370평으로 확장하고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불이문·홍살문·비각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의 실천도량으로 정화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사육신 추모제향’을 올리고 있다.

2010년 12월에는 ‘사육신역사관’이 완공되어 ‘단종충신역사관’으로 2011년 7월에 개관되었다. 이 역사관은 2008년 4월에 착공되었으며, 지하 1층 지상 2층에 연면적 812㎡의 규모이다. 역사관에는 단종복위를 꾀한 사육신 등에 관한 그들의 유품과 고서적 등 자료를 비롯하여, 당시 사회상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전시실과 체험교육실·영상실 등이 갖춰진다.

새롭게 단장한 사육신 역사공원은 동작구 올레길 코스에 포함되어 많은 시민이 방문하고, 나아가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그 운영의 묘는 살리지 못하고 있다. 그 실정에 대하여는 글 뒤에 다시 언급하겠다.

홍살문으로 된 공원 입구에 들어서 경사진 길을 따라 오르면 의절사 건물을 먼저 만난다. 불이문을 지나 의절사 경내로 들어가면 왼쪽에 사육신묘비, 오른쪽에는 육각의 사육신비死六臣碑가 있고, 정면에는 의절사 사당 건물이 있다.

사육신묘비는 팔작지붕의 옥개형 4면비로, 전액은 ‘有明朝鮮國六臣墓碑銘’, 비제는 ‘有明朝鮮國六臣墓碑銘幷序’이다. 세운 연대는 ‘崇禎三壬寅月日立’으로 정조 6년(1782)이며, 전체 높이는 311㎝, 비신 78.5×214×42㎝ 크기이다. 사육신비는 1955년에 세운 6각 비로, 상단에 비문, 중·하단에 손재형이 쓴 육신의 이름과 그들의 시詩가 새겨져 있다.

의절사 내에는 신위가 동쪽으로부터 김문기·박팽년·유응부·이개·류성원·성삼문·하위지 순으로 모셔져 있는데, 이는 의절사 내의 위패의 배치와 같은 순서이다. 이른바 사육신은 단종 3년(1455)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뒤의 세조)이 왕위를 빼앗고 단종을 몰아내자 이에 분개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다.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세조 일파를 처단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이들의 계획이 좌절되자 거사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 등이 세조에게 단종복위 계획을 밀고하여 연루자들이 모두 붙잡혔다.

성삼문은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렀으며, 다른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받았다. 성삼문·박팽년·유응부·이개는 단근질로 죽음을 당하였고, 하위지는 참살 당하였다.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김문기도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 사망하였다. 이밖에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가는 등 70여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그 후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자 숙종 7년(1681) 이 산기슭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를 세웠으며 1955년 5월에 육각의 사육신비를 세웠다. 그런데 현재 이곳에 여섯이 아닌 일곱 분의 묘가 조성되어 있는 경위는 다음과 같다. 세조 2년 단종복위사건 가담자들의 참혹한 죽음 이후, 어느 스님이 성승·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 다섯 분의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한다.

'세조실록世祖實錄' 세조 2년 6월 병오 조에는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김문기·박팽년을 비롯한 성승·유응부 등의 이름이 보이고,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는 성삼문·박팽년·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를 사육신이라 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승의 묘를 찾을 수 없어 네 분의 묘만 있었으나, 여전히 사육신묘라 불려졌다.

이리하여 서울특별시가 사육신묘 일대를 성역화하면서 육신에 대한 논란을 조정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사육신묘에는 일곱 분의 묘가 조성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숙종 17년(1691)에 사육신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민절서원은 노량진동 사육신묘의 산정상부에 위치하였으며, 현재는 주춧돌 6개만 남아 있다.

사육신에 대한 논란은 세조 이후 계속되다가 숙종 때에 사육신의 충절을 인정하고 서원이 세워지고, 어필로 ‘愍節書院’이란 편액을 하사하였다. 1871년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남아 있었으나, 언제 어떻게 사원이 철폐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한편 사육신묘 주위에 노강서원(鷺江書院)과 사충서원(四忠書院)이 설치되어, 선비들의 기개를 숭모하였으며, 지금은 터만 전하고 있다. 노강서원은 사육신묘에서 북동쪽으로 약 120m 떨어진 주택가에 있었다. 노량진동 유원아파트 103동 앞 아파트 입구 동편에 표석이 설치되어있다. 노강서원은 동작구 본동 사육신묘 서쪽 기슭 가칠목에 있던 서원으로 기사환국(己巳換局·1689) 때 죽은 박태보(1654∼1689)를 배향하던 서원이다. 박태보는 서인으로서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진도로 유배 도중 노량진에서 죽었다.

노강서원이 있던 곳은 당시 신호의 집으로 박태보가 이곳에서 묵다가 죽었다고 한다. 숙종 23년(1697)에 박태보를 위해서 이곳에 서원을 건립하고 노강서원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1871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으며, 지금은 의정부 장암동 수락산 기슭에 복원되어 있다.

한편 사충서원은 노량진동 사육신묘 입구로 들어가는 길 초입 동쪽에 있었다. 즉 예전의 노량진동사무소가 있던 사육신묘 입구 동산에 있었는데, 영조 1년(1725)에 세워진 사액서원(賜額書院)이었다. 사충서원은 1721~1722년 신임사화(辛壬士禍)로 희생된 김창집·이건명··조태채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경종이 즉위하자 후손이 없던 경종의 후계 문제로 노론과 소론이 당쟁을 하였다. 이때 경종을 옹립한 소론이 연잉군(영조)을 세자로 세운 노론 4대신 등을 역모로 몰아 죽였으나, 경종이 병사하고 영조가 즉위하자 이 네 명의 대신을 복권시키고 사충서원을 세워 모셨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를 모면했으나, 1927년 철도 용지로 수용되어 용산구 보광동 28번지로 이전하였다가 철폐되었다.

이후 신임사화의 내력을 새긴 묘정비만이 세워져 있다가, 1968년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상산곡리로 옮겨져 복원되었다. 한편 최근에 사육신 논쟁의 숫자놀음에 안타까운 일이 벌어져 많은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2011년 7월 14일 사육신역사공원 내에 ‘단종충신역사관’이 개설되어 어린이교실이 운영되는 등 역사체험관으로서으로서의 구실을 크게 기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초에 ‘사육신역사관’의 이름으로 개관하려 하였다가 단종을 위해 절개를 지킨 32명의 충신을 다루면서 이름을 바꾼 것이 문제가 되어 사육신 후손들의 ‘사육신수호회’와 ‘일곱 번째 사육신’(조선일보 2011년 8월 6일자)으로 불리는 새로 묘역과 위패가 마련된 당시 공조판서 김문기 후손들이 맞서면서 ‘단종충신역사관’의 운영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결과 어린이들의 나라사랑 교육과 시민들의 역사교육 현장이 될 것을 기대했던 역사관은 불과 개관 20일 만에 폐쇄되기에 이르렀고, 언제 다시 문을 열지 기약이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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