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S Map으로 본 서울의 아파트와 욕망의 밑그림
GIS Map으로 본 서울의 아파트와 욕망의 밑그림
  • 송규봉 객원논설위원
  • 승인 2012.02.05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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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증식 수단은 그만, 사람이 중심인 서울공동체 만들어야

[1] 내가 제일 잘나가 ~

수입자동차에 대해서 조사하라고 기말고사를 냈다. 대학원생 다섯 팀의 발표를 들었다. 그 중 한 팀의 발표내용은 이렇다. 대한민국에서 ‘자동차’ 하나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나 이런 사람이야~!!” 한국 소비자들에게 ‘자동차’는 과시하고 싶은 욕구,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신분상승을 느끼고 이것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수입자동차 마케팅의 핵심은 ‘욕망’을 자극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진단이다.

패션업체 근무하는 30대 김 이사는 차별성과 평판 때문에 수입차를 골랐다고 했다. 그는 8년간 국산 스포츠카를 몰다 2년 전 중형 수입차로 바꿨다. 김 이사는 “지금의 내 나이와 지위에 걸맞고 디자인도 맘에 드는 국산차를 구하기 어려웠다. 국산 대형차를 타면 너무 딱딱하고 ‘올드’한 이미지를 풍기게 될 것 같았다. 이제 자동차도 옷을 고르듯 ‘패션’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넌 뒤를 따라오지만 난 앞만 보고 질주해. 옷장을 열어 가장 상큼한 옷을 걸치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꼼꼼히 살피고. 내가 봐도 내가 좀 끝내주잖아. 뭘 쫌 하는 사람들은 다 알아서 알아봐.” 그룹 2NE1이 부르는 ‘내가 제일 잘 나가’의 가사다. 외부에서 활동하고 사람을 만나는 곳에서 자신의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표현수단이 옷, 액서사리, 자동차가 되고 있다. 굳이 시시콜콜 자기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나 이 정도는 되거든!!’표현할 수 있다.

밖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 패션과 자동차라면 살고 있는 집은 어떤가? 대한민국 주거수준은 탑다운(Top-Down)으로 서열이 결정된다. 강남 아파트가 최상층을 형성하고 나머지는 가격대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굳이 시시콜콜 생활수준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무슨 구 무슨 동 어떤 아파트에 사는지 말 한마디로 충분하다.

[2]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꿈인 나라

“저 밑은 재개발하고 난 다음에 아파트들이 생길 거예요. 생활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거예요. 그리고 나면 우리 애들이 학교에서 좀 힘들까 봐 걱정이에요. 우리는 아파트에 안사니까요. 아파트 사는 사람하고 단독에서 사는 사람하고 경계심이 있어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그냥 남들을 밑으로 보는 거예요. 사실 아파트에 사는 건 자기가 부자라는 뜻이죠. 아파트에 산다…. 아, 잘 산다! 그런 생각을 해요, 아이들이 아파트를 좋아하더라고, 애들도. 우리 작은 아이는 자주 ‘우리 아파트로 언제 이사가?’ 그래요. 아파트에 사는 게 꿈이에요.”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서울의 한 재개발지역에 사는 40대 주부와 인터뷰한 내용을 녹취한 것이다.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은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출판되었다. 프랑스인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은 정말로 이상한 나라였다. 새로 지어지는 주택의 90%가 아파트인 나라였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토록 이 나라의 아파트 열풍을 불러 일으켰을까? 그녀가 박사논문으로 한국 아파트를 선택한 이유였다.

그녀가 처음 연구를 시작할 때, 대한민국의 아파트 열풍의 이유를 만나는 한국 사람마다 물어보았다. ‘땅은 좁은데 사람은 많아 저절로 만들어진 주택문화’라는 대답이 거의 100%에 가까웠다. 정말 그럴까 호기심이 들었다고 한다. 박사논문의 결론은 전혀 다른 내용으로 정리되었다. 한국의 아파트 열풍은 권위주의 정부와 재벌기업의 ‘동맹’으로 이루어진 압축개발의 결과라는 것이다.

[3] 독재정권과 재벌의 동맹작품

1960년대에서 1990년 사이 농경사회에서 도시산업사회로의 빠른 전환, 군대식 선전구호, 독재정권에 의한 외향적 경제성장 등은 한국적 성장모델의 특징이다. 서울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아파트 단지들은 강력한 권위주의 정부가 재벌과 손을 잡고 급격한 성장을 추구하면서 만들어 낸 한국형 발전모델의 ‘압축적 표상’인 셈이다.

한국에서 정부의 직접투자가 빈약했던 주택부문은 산업발전의 희생양이었다. 국민총생산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주택부문에 대한 정부의 재정적인 노력은 미미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 전 국민이 수락했던 수많은 물질적 희생의 사례에 해당하는 것이다. 1970년대 북한을 능가해야 한다는 ‘총량주의적 외형성장형 전략’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택건설 200만호’ ‘주택건설 180일 작전’이라는 구호가 난무하고 ‘복부인’, ‘땅 투기’, ‘기획부동산’의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한국의 공공주택은 국민주택기금이나 주택은행으로부터 건설 지원을 받은 25평 이하의 주택을 의미하거나, 주택공사가 건설한 주택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런 소형 아파트조차 거의 대부분 지불능력이 있는 계층들에게 돌아갔다. 장기임대주택은 거의 없고 주택매매 정책만이 압도한 것이다.

소형 아파트를 희생시켜 대형 아파트를 건설함으로써 하위계층을 주변지역으로 내몰고 도심을 상층계층이 차지하는 공간과 부의 재편이 급격히 일어났다.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분양되는 아파트를 매입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재테크와 재산증식의 수단이 되었다. 아파트에 당첨된 가구는 중간계층으로 편입되면서 체제의 수혜자이자 동조자가 되는 것이다. 줄레조의 진단법이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단지들은 시멘트에서 거실의 가구, 문틀, 비디오 경비시스템, 냉장고, 비디오 등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재벌기업의 제품이다. 브루스커밍스는 한국의 놀라운 성공비결을 재벌기업과 국가의 동맹에서 찾는다. 이제 아파트는 브랜드로 탈바꿈된 지 오래다. 특허청에 등록된 아파트 상품명은 30개를 넘어선지 오래다. 이제 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 특정 건설사의 특정 브랜드에 사는 것이다.

한국에서 아파트단지는 ‘중간계급 제조공장’이라고 줄레조는 적고 있다. 부의 외형적 표현수단이며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이미지로 진화했다고 진단한다. 프랑스 연구자의 눈에 부동산 잡지에 학군번호와 고등학교, 중학교의 이름이 매물의 특징과 시세와 함께 표기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했다. 부의 서열화가 가능해지고 미래신분을 획득하기 위한 적극적인 재테크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과거 주택과 달리 전국 모든 아파트가 평형과 가격대로 상품 표준화가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4] 주거 종 다양성과 자아정체감

오늘의 한국도 예외 없이 저마다 개성을 추구하고 가치관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상당수 전문가들의 의견에 동의하는가? 국내 어느 도시라도 둘러보라. 다 거기서 거기다. 아파트 단지가 병풍처럼 도시를 둘러싸고 어디든지 솟아올라 있다. 한국에서 개성의 차별화는 거실의 전자제품이 어느 회사 것인지, 소파의 재질은 무엇인지, 커튼은 어떤 것을 달았나 정도로 구분된다. 등산을 가도 브랜드만 달랐지 거의 비슷비슷한 아웃도어 제품을 입고 다닌다. 그래서 어느 외국 디자이너에게 서울에서 머문 며칠 동안 받은 인상이 무엇이냐고 묻자. ‘검은 대형차에 모두 핸드폰으로 통화하고 있는’ 획일성에 놀랐다고 했다.

어느 정신건강연구소가 진행한 ‘한국인의 정체성 연구’의 결과보고는 우리 사회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이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의 자아정체감이 매우 취약한 수준이다. 한국인 성인남녀 199명을 심층 면담해 자아정체감을 분석한 결과, 한국인의 4명 중 3명이나 자아정체감이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안정 지향적이며 현실순응형이지만 위기에 약한 ‘폐쇄군’이 74.4%인 반면, 능동적이고 진취적 개척자형인 ‘성취군’은 12.6%에 불과했다.

폐쇄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체면이나 명분, 서열을 지나치게 따지는 권위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 자신의 자존심이나 체면이 손상됐다고 느끼면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등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보고서는 자아정체감이 취약하게 된 원인을 1960~70년대 한국사회의 급속한 발전 과정에서 집단의 목표가 강조되고, 개인의 희생이 요구되면서 자아정체감 발달이 성숙되지 못한 것에서 찾고 있다. OECD 자살율 1위, 양주 소비율 1위와 같은 한국 사회의 사회병리적 현상들도 자아정체감과 관련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체면, 명분, 서열, 자존심 때문에 더욱 더 외부적으로 쉽게 표현되는 패션, 자동차, 아파트에 매달리게 된다.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채우고 욕망하고 과시하고 좌절하는 것이다. 이런 풍토 속에서 삶의 가치와 개성의 다양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74.4%의 동일유형 속에서 제각각 소속감과 외형적 과시를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5] 사람이 중심인 도시

인구가 급증하는 동안 서울은 응급조치식으로 주택과 도로를 공급할 수밖에 없었다. 날림 도시가 만들어진 것이다. 청계천이 복원되고 육교도 철거가 되면서 걷기 좋은 도시, 생태환경의 도시로 바뀔 것 같은 기대감을 높여줬다. 그러나 서울전역이 뉴타운,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고 초고층 건물을 장려하면서 다시 한 번 ‘묻지마식’ 개발열풍이 불어왔다. 하지만 그 거품이 빠지자 주민들 간의 갈등을 커지고 도시민의 생활공동체는 삭막해져 가고 있다. 세종대 김수현 교수가 성북구청 구정생활위원회 최종보고서에 내놓은 진단이다.

김 교수는 도시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남 흉내내기 식이 아니라 지역 고유의 특성과 경쟁력을 찾아야 한다고. 무분별한 거품식 개발, 불도저로 노후주택이라면 모두 밀어버리고 아파트만 짓는 방식을 재고해야 한다고. 크고 높은 건물, 대형 건설사의 브랜드 아파트가 동네의 자랑이 아니고 수준 높은 복지, 교육, 쾌적한 환경, 가장 중요하게는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따뜻하게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 복원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너무나 많은 도시들이 같은 모습과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 너무나 많은 도시들이 추하고, 영혼이 없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지 못한다. 너무나 많은 도시들이 그들의 독특한 문화적 차별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도시문화를 주창하는 찰스 랜들리의 저작 한국어판 서문에 나온 내용이다.

최근 서울시장은 동네 만들기, 10분 도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도시정책을 발표했다. 서울에는 수십 억대 아파트와 월세 몇만 원의 쪽방이 공존하고 있다. 마치 도봉산과 북한산에 아름드리 소나무와 키 작은 관목이 공존하는 것과 같다. 거대한 잣나무도 숲을 이루고 사이사이 야생화가 피어난다. 철쭉과 억새풀도 군락을 이루면 같은 산에 어우러져 지낸다. 자연 생태계에서 이 하나하나의 존재는 서로 기대고 도움을 준다. 식물의 가치를 크기와 무게로만 잴 수 없듯이 사람의 가치도 패션, 자동차, 아파트로만 잴 수 없다.

[6] 집이 사람을 만든다?

사람이 집을 만들다. 그러나 나중에는 집이 사람을 만든다. 윈스턴처칠의 명언이다. 건축물이 사람의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행복감, 지적 성취, 스트레스 등 수많은 심리적 항목에 집의 영향력은 막대하다. 그러니 작가들은 집필 장소를 가린다. 맹자의 어머니가 이사를 다녔던 이유도 그러하다. 그것처럼 일반시민들도 자신에게 최선의 주거형태를 선택하려 노력한다.

다년간 심리상담을 해온 치료사는 한국에서 불행의 시작은 낮은 자존감에 있다고 잘라 말한다. 자존감은 ‘나는 괜찮은 사람, 존중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밝은 자기개념에서 온다.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한끝 차이다. 자존심은 남과의 경쟁에서 이겨 얻는 긍정이다. 승리해야만 유지할 수 있는 심리상태이다. 실패하면 열등감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자존감은 자기도 상대방도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

열 배쯤 부자는 시기하게 되고 만 배쯤 부자에게는 노예가 되고 만다는 사마천식 세상진단도 내가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 부, 출세의 지표들 또한 내가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 똑같이 하버드대학교를 나와도 월가의 금융회사 CEO가 되어 행복한 A도 있고 호숫가 조용한 오두막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B도 있다. A > B이거나 B < A와 같은 부등호도 결국은 자기 스스로 판단할 문제이다.

“이곳 경치의 가장 귀한 요소는 때 묻지 않은 햇빛이니. … 그대는 아무와도 다투지 않으며, 질문으로 괴로움을 받지도 않는다. 소박한 갈색 옷을 걸치고, 처음이나 지금이나 순하기 짝이 없다.” 호숫가에 앉아 소로우는 다시 적어간다. “밥벌이를 그대의 직업으로 삼지 말고 도락으로 삼으라. 대지를 즐기되 소유하려 들지 마라. 진취성과 신념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면서 사고 팔고 농노처럼 인생을 보내는 것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연중 가장 바쁜 이사철에 다시 집에 대해 생각한다. 숲 속 오두막집에 살며 소로우가 들려준 이야기는 울림이 길고 선연하다. 생활비를 버느라 자기의 모든 시간을 뺏겨 여유가 없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견해를 용납하지 못하는 전문가들 그리고 남의 집의 찬장과 침대를 들여다보고 가는 무례한 가정주부들, 안정된 전문직의 닦여진 가도를 걷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결론을 내린 더 이상 젊지 않은 젊은이들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1845년 월든 호숫가의 이야기는 오늘날 서울에도 쟁쟁하게 울린다. 적어도 소로우에게 집이 그의 영혼을 지배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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