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S Map으로 본 국회의원 희망자와 유권자의 정치학
GIS Map으로 본 국회의원 희망자와 유권자의 정치학
  • 송규봉 객원논설위원
  • 승인 2012.03.1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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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성으로 뽑은 국회, 일도 건성으로… 유권자의 ‘몫’은?

B와 D 사이의 C

B와 D 사이의 C가 인생이다. 사르트르는 인생을 출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라고 압축했다. 다가오는 19대 총선, 자신의 인생이 걸린 선택들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경쟁률은 8대1이다. 지난 3월 4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공하는 제19대 국회의원 예비후보자 통계를 보면 전국 246개 지역구 의석을 놓고 총 1978명이 등록을 마쳤다. 서울은 48개 의석을 두고 459명이 등록해 9.6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동대문갑(20:1), 용산(18:1), 종로(17:1)는 가장 경쟁이 치열한 곳들이다.

2010년 닐슨코리아는 대한민국 12개 직업군에 대한 신뢰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성인남녀 1천명을 설문한 결과 국회의원의 사회적 신뢰도는 10점 만점 중 2.4점으로 교사, 교수, 언론인, 검사, 공무원 등 12개 직업군 중 꼴찌였다. 2004년 한국사회조사연구소가 전국 467개 초·중·고생 2만76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 학생들은 우리 사회에 대한 신뢰도 점수를 100점 만점에 평균 38.8점으로 매겼다. 낙제점이다. ‘0점’을 준 학생만 12.8%였다. 학생들은 신뢰할 수 없는 대상 1위로 국회의원(80%)을 꼽았고 상품광고(73.9%), 대통령(61.6%), 언론(53.6%)이 뒤를 이었다.

험악한 비판과 불신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을 희망하는 숫자는 줄지 않는다. 혐오의 대상이라지만 그래도 꼭 해보고 싶은 직업인가? 왜 그토록 국회의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10년 넘게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친구는 그 이유를 ‘잘 포장된 욕심’ 때문이라 했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정치한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만, 대부분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의원직을 이용하기 때문’이란다.

작년 한 후배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는 것을 고민 중이라며 ‘자문’을 구하러 찾아왔다. 건성으로 답해줄 수가 없었다. 밖에서 보기엔 한심해 보일지 모르지만 정말 어려운 자리라서 인생의 모든 것을 건 선택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럼 다음 만날 때, 본인이 국회의원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한 문장, 한 단락, 10분짜리, 1시간짜리로 준비해오시게.” 그때 들어보고 의견을 주겠노라 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당부했다. 국회의원직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도 미리 생각해오라고 했다. 아직 그 대답을 듣지 못했다.

역사에서 불을 취하다

역사의 제단에서 재를 취하지 말고 불을 취하라 했다. 옛사람의 발자취를 뒤따르지 말고, 그들이 추구하던 것을 추구하라 했다. 오늘날에도 슈퍼스타인 정조와 정약용 이야기를 나눠보자. 정조는 인재혁신으로 개혁군주의 첫발을 뗀다. 정조는 영조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 국왕으로서 본격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정조는 신하들이 모인 첫 조회에서 자신의 국정운영의 기조를 밝혔다. ‘앞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길러내며, 국방을 튼튼히 다지고, 국가 재정을 튼실히 하는 데 역점을 두겠다’고 선언했다. 대부분의 국왕들이 하는 소리다.

당시 정조가 파악한 당대의 현실은 ‘큰 병을 앓은 사람이 원기가 허약해지고 혈맥이 막히며 혹이 솟아 오른 것’과 같다고 보았다. 국가의 근본을 굳건히 하는 것은 ‘백성에게 달려 있으며, 백성을 기르는 것은 먹을 것에 달려 있다. 먹을 것이 풍족하면 가르칠 수 있고 가르친 후에는 반드시 경계하고 보호하며 도와주고 보태주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나라를 보호하는 근본’이라고 천명한다. 이렇게 국정기조를 밝힌 스물  일곱의 정조는 말대로 실천을 했는가?

정조가 보위에 오르고 제일 먼저 단행한 사업은 규장각을 설치한 것이다. 정조는 1776년 국왕이 된 직후에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선왕 영조가 지은 글을 모아서 정리하는 사업부터 시작했다. 요즘 말로 R&D(연구개발)사업부터 시작한 것이다. 1780년대에 들어와 이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정조는 자신에게 필요한 인재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정조는 문과시험에 합격한 37세 이하의 당하관 가운데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을 다시 선발하여, 매월 이들의 학문과 문장력을 시험하게 했다. 구체적으로 사서(四書), 삼경(三經), 사기(史記)를 보름마다 한 번씩 시험하고, 문장은 논(論), 책(策), 표(表), 시문(詩文)으로 구분하여 매월 한 번은 국왕이 시험하고 다른 한 번은 규장각 각신(閣臣)이 시험하게 했다. 그 결과 세 번 수석한 사람은 승진시키고, 성적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벌을 내렸다. 이렇게 길러진 인재들은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는 핵심리더로 성장했다. 정약용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암행어사 정약용, 백성들 속으로

1787년(정조 11)에 정조가 직접 작성한 임명장이 있다. ‘전라도 암행어사 심진현에게 내리는 봉서’이다. 봉서(封書)란 국왕이 써서 밀봉한 편지다. 암행어사는 도성을 벗어난 다음에야 이를 개봉하여 자신이 방문할 지역과 현지에서 조사해야 할 사항을 열어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저 호남의 백성들은 암행어사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가 이제 십 년이 되었다. 내가 밤낮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어찌 하루라도 호남의 백성들을 잊어서 그랬겠는가? 탐문하고 살피는 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장리(수령)들은 꺼리는 것이 없고 백성들은 믿을 데가 없게 될까 하여 그런 것이다. (중략) 호남의 백성들이 장차 목을 길게 빼고 서울을 바라보며 ‘궁궐의 문은 너무 깊고 구석진 시골은 너무 멀다. 우리들의 질병과 고통, 근심과 기쁨을 누가 국왕께 아뢸 것인가’라 할 것이니, 내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정조는 심진현에게 여섯 가지의 업무를 지시했다. 굶주린 백성들을 제대로 가려서 적절한 음식물을 제공하는지, 수령이나 아전, 향임(鄕任)들이 중간에 농간을 부려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는지, 관리로 천거할 만한 사람과 효행이나 정절이 뛰어난 사람이 있는지를 알아보라는 내용이었다.

암행어사 심진현은 같은 해 4월 정조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담양부사 등 세 명은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받고 처벌받았다. 운봉현감 등 두 명은 바로 파직 당했다. 남원 정조문의 처와 순천 무당 추절창의 아내는 표창과 면세혜택으로 포상을 받았다. 암행어사는 정조 이전에도 있었던 제도이다. 정조에 이르러 봉서의 길이가 길어지고 지시사항은 점점 구체화되었다. 백성의 살림살이에 대한 국왕의 관심이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어사)들이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내가 구중궁궐 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세세히 살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 경기의 천 리 지역에 흉년이 들었는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혜택은 아래로 미치지 않고, 폐단이 위로 알려지지 않아 (중략) 백성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오직 어사뿐이며 수령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두려워하는 것도 어사뿐이다. (중략) 그대들은 맡은 바 직책에 신중하여 관부(官府)와 시장, 촌락을 드나들면서 세세히 조사해 모으고, 조정에 돌아와 일일이 조목조목 적어서 아뢰도록 하라.”

1794년(정조 18) 경기도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고통이 심해졌다. 정조는 어사 10명과 감찰관 5명으로 ‘진상조사단’을 구성했다.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투입하여 동시에 여러 지역에서 감찰활동이 비밀스럽고 신속하게 진행되도록 조치한 것이다. 그 조사단에 정약용이 포함되었다. 정약용이 파견된 지역은 적성, 마전, 연천, 삭녕 일대였다. 지금의 경기도 서북부 지역이다.

현장조사에서 돌아온 정약용은 연천의 전 현감 김양직이 백성들에게 돌아갈 곡식을 도둑질 해먹은 것, 삭녕의 전 군수 강명길이 백성들에게 부당한 세금을 과하게 물리고 지방관리들로부터 뇌물을 먹었음을 조사하여 처벌할 것을 보고한다. 훗날 정약용이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일생을 헌신한 데에는 이처럼 정조의 국정활동과 암행감찰에 참여하면서 절절한 현장경험을 가졌기 때문이다. 좋은 리더와 함께 훌륭한 인재가 성장한 것이다.

힘들어 왕 노릇 못해먹겠다

정조는 때론 신하들에게 다정한 국왕이었다. 1798년 섣달 열흘, 숙직하는 병조판서에서 세찬(설에 차리는 음식)을 하사할 때 어찰(임금의 편지)을 함께 보냈다. ‘어찰등초’의 마지막 장에 실린 내용이다. “숙직하는 긴긴 밤을 종알종알 떠드는 자들과 맞대고 있을 테니 기분 돋울 일이 뭐가 있겠는가? 민요에 ‘소녀들이 별을 세며, 별 하나 나 하나!’라고 하던데 이 세찬을 앞에 놓고 병조판서가 한 해를 보낸다면, 나와 함께하는 것이므로 민요에서 말한 것과 정말 똑같으리라. 이만 줄인다.”

늦은 밤 업무를 보고 있는 신하에게 음식과 편지를 보내자 이를 직접 받아본 서형수는 이렇게 따로 적어 놓았다. “신하의 기운을 북돋워주고, ‘어디를 가든 제대로 하지 않음이 없도록 하라’는 성인의 가르침을 권유하는 말씀에 이르면, 자애로운 어버이가 어린 아들을 돌보는 것도, 엄한 스승이 제자를 이끄는 것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 오호라! 인생은 유유하고 한 백 년은 아침저녁 사이지만 억겁토록 잠시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지기(知己)에 대한 감동, 이것일 뿐이다.” 임금을 ‘지기’라고 표현했다. 신하가 임금더러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라고 한 것이다.

정조는 ‘공부 공부’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대들은 근래에 어떤 책을 읽고 있느냐 하였는데 신하들이 읽지 못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정조는 “이는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공무를 보느라고 여가가 적기야 하겠지만, 하루 한 편의 글을 읽고자 한다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과정을 세워 날마다 규칙적으로 해나간다면 일 년이면 몇 질(帙)의 경서를 읽을 수 있을 것이고, 몇 년간 쉬지 않고 꾸준히 해나간다면 칠서(七書 : 사서삼경,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네 경전과 <시경>, <서경>, <주역>)를 두루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따로 독서할 날짜를 구하고자 한다면 책을 읽을 수 있는 때가 없을 것이다. 선비라면서 경서를 소리 내어 읽어 익히지 못한다면 선비다운 선비가 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나는 바빠서 눈코 뜰 새 없으니 괴롭고 괴로운 일이라. (중략) 백성이 마음에 걸리고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날마다 늙고 지쳐간다. (중략) 사흘 동안 눈을 붙이지 못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대로 일하느라 피곤하지만 요행이 몸져눕는 것만은 면했다. (중략) 닭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가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 사이)가 지나서야 비로소 밥을 먹었으니, 지쳐 둔해진 정력이 날이 갈수록 소모될 뿐이라. (중략) 수확하기 전까지는 하루도 걱정하지 않는 날이 없을 것이니, 임금 노릇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단 말인가?” 정치적 반대파 수장 심환지에게 보내는 밀서에 적어 놓은 정조의 솔직한 심경이다.

암행어사 같은 국회의원을 기다리며

훗날 유배지에서 정약용은 아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 중에 한 단락을 들여다 보자.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는데 옳고 그름의 기준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에 관한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단계의 큰 등급이 나온다. 옳음을 고수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단계이고 옳음을 고수하고도 해를 입는 경우가 두 번째다. 셋째는 그름을 추종하고도 이익을 얻음이요, 마지막 가장 낮은 단계는 그름을 추종하고 해를 보는 경우”라고 가르친다.

유권자들도 옳고 이로운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싶다. 옳은 것을 추구하다가 손해 보는 국회의원도 보고 싶다. 그러나 옳아도 이롭지도 못한 사람은 뽑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잘 포장된 욕심’으로 의원직을 써먹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미리 알 수 있단 말인가? 세종은 인재문제에 관하여 ‘훌륭한 인재를 찾아내려는 절실한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두 번째로는 그런 인재를 알아보는 것, 세 번째로 공적을 세워 모두에게 기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에 주목했다.

정치인을 싸잡아 도매금으로 비판하는 것은 가장 수동적인 정치 참여다.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전체 국회의원 중 10%만 제대로 된 인재를 뽑아도 정치에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국민들을 보살필 것이고 공부하고 대안을 내놓기 위해 헌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권자의 엉성한 판별력이 오늘날 신뢰도 최하위 정치를 유지시키는 진정한 배경이다. 건성으로 뽑은 국회가 건성으로 일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세종의 제안처럼, 진정 준비된 인재를 열심히 찾아야 한다. 흙 속의 진주를 찾아야 한다. 어떻게? 그가 살아온 인생을 자세히 보라. 10년, 20년, 30년 일관되게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과 노고를 쏟아온 사람인지를 따져보고 확인해야 한다. 학력과 경력은 껍데기일 뿐이다. 남을 위해 제대로 살았는지를 봐야 한다. 특히 일관성이 있는 사람, 다수를 위해 다수를 섬긴 조직에서 일해온 사람을 주목해야 한다. 다수 위에 군림해온 기관, 조직, 직위에 있었던 사람들이 항상 가장 위험하다. 경력이 아니라 실제 남을 위해 애쓴 행로를 봐야 한다.

우리는 지금 2조 원의 투자를 결정하려는 참이다. 국회의원 1명의 연봉 1억2000만 원을 포함, 의원실 당 7명의 보좌진, 국회도서관, 국회사무처 등 국회예산은 연간 5000억 원 규모다. 4년이면 2조 원인 셈이다. 이 돈을 투자해 우리를 대신해서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이다. 우리가 주인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들이 주인행세를 할 것이니, 눈 여겨 보자. 난 이미 한 사람을 정했다. 그가 국민들의 ‘지기’이자 국민들을 위한 ‘암행어사’가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의 30년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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