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S Map으로 본 제주 강정포구와 역사 이야기
GIS Map으로 본 제주 강정포구와 역사 이야기
  • 송규봉 객원논설위원
  • 승인 2012.03.17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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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17년 걸린 ‘만장일치’와 대한민국의 일방주의

세종대왕은 절차와 명분 모든 것을 손에 쥐고도 17년 동안 민주적 토의와 정책의 완성도를 높여 마지막에는 어전회의의 만장일치를 이끌어냈다. 정부와 해군도 역사에서 배우라. 성군과 성웅이 어떻게 백성들과 함께 했는지 말이다.

생각의 90도 회전

지구는 둥글다. 동일한 땅도 동서남북 보는 방향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읽힌다. 지도제작에서 방위를 정하는 것은 첫 번째 작업에 해당한다. 정북향을 정해놓아야 계획한 지도를 만들 수 있다. 지도 제작도구인 GIS(지리정보시스템)를 이용하면 지표 데이터를 360도 마음대로 회전시킬 수 있다. 한반도 지도를 180도 회전시켜보면 중국 대륙이 아래에 위치하고 태평양이 위로 올라가 뒤집힌 한반도가 바다를 머리 위에 이고 있는 형상이 된다.

국가에서 추진하는 정책도 권력 최상층에서 내려다 볼 때와 바닥 민심에서 올려다 볼 때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지금 제주도는 몇 년째 서귀포 해군기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청와대, 서울, 육지의 눈으로 볼 때 제주도는 대한민국 영토의 최남단이자 변방처럼 보인다. 인구 5천만의 부속된 인구 50만의 변방 섬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를 시계 가는 방향으로 90도만 회전해보면 제주도는 한반도가 시작되는 왼쪽 첫 번째 자리에 위치한다. 얼굴이자 관문이 된다.

군사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시각으로 동북아 정세와 태평양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군사력 경쟁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일반국민들은 상식과 민주적 절차를 기대한다. 대한민국 해군은 1945년 삼군 중 가장 먼저 창설되었다. ‘우리 바다는 우리 손으로 지킨다’는 구호 아래 ‘우리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핵심임무로 삼고 있다.

해군 홈페이지에는 스스로 ‘국민 속의 해군’이라는 소개란이 있다. 해군이 작성한 내용에는 해양질서를 유지하고 해양개발의 충실한 보호자 역할을 수행한다고 적고 있다. 해상재난 예방 및 구조의 최첨병, 해양환경의 감시자, 국위선양의 선도자로서 국민들의 진취적인 해양사상 고취를 위한 실습장을 제공한다. 국가방위, 외교지원, 국민생활보호, 경제의 활력소의 역할도 자랑하고 있다. 이런 자부심이 담긴 존재이유와 역할이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할 시점이다.

이순신 제독의 농사법

해군 공식 사이트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해군제독으로 표현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3도 수군을 이끌고 일본함대를 15차례에 걸쳐 격파하여 전세를 역전시키고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표현했다. 이순신을 단지 뛰어난 군인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그의 리더십의 반쪽만 아는 것이다. 그는 정치행정가로서도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이순신 장군은 피난민 구호, 백성의 생활안정, 군사의 식량 확보에 주력한다. ‘1594년 5월 26일. 이원과 토병 23명을 본영으로 보내어 보리를 수확하라고 일러 보냈다.’ ‘1596년 2월 8일. 저녁에 군량에 대한 장부를 만들고 흥양 둔전에서 추수한 벼 352섬을 받아 들였다.’

이순신은 백성들이 정착하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먹고 사는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해나갔다. 조정에 보고서를 올려 여수 돌산섬, 흥양의 도양장, 해남의 황원곶, 강진의 화이도 등에 있는 국가 소유의 목장에서 백성들이 농사를 짓도록 했다. 조정에서 임명한 둔전의 감독관이 목동들을 학대한다는 보고를 듣고 담당자 교체를 청원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순신의 관할지에는 군사들이 다시 돌아오고 백성들은 ‘생명과 재산’을 안심하고 의탁할 수 있었다. 백성이 군사요 군사가 곧 백성이다.

조선제독 이순신은 왜 그토록 백성들에게 관심을 가졌을까? 이순신은 전투는 군사들이 하지만 전쟁은 백성의 지원과 지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승리의 요체를 군사보다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백성들의 지지와 신뢰를 획득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전쟁을 이기는 방안을 전략이라 하고, 전투에 이기는 방법을 전술이라고 한다. 전투에 이기고도 전쟁에는 질 수 있고, 전투에 지고도 전쟁은 승리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에게 백성의 안정과 지지는 확고한 전략적 고려사항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백성들을 괴롭히는 군사들의 행동에 매우 엄격했다. ‘1592년 1월 16일. 토병(土兵) 박몽세는 석수로서 선생원의 쇄석(쇠사슬 박을 돌)을 뜨는 곳에 갔다가 이웃집 개에게까지 피해를 끼쳤으므로, 곤장 여든 대를 쳤다.’ 이순신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군사와 관리, 백성을 괴롭히는 불량 백성, 적에게 항복하거나, 적을 이롭게 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서운 군법으로 다스렸다.
신뢰로 얻은 민심

백의종군 길에 나선 이순신은 공식 지휘관이 아니었다. 그는 민간인에 준해 어떤 권력남용도 조심한다. 정유년(1597)의 6월 2일 난중일기를 보자. ‘삼가현(경남 합천군)에 도착했다. 고을 사람들이 밥을 지어 와서 먹으라고 했다. 먹지 말라고 종들을 타일렀다.’ 다음날 도원수(권율)의 군관 유홍(柳泓)이 흥양에서 왔다. 그에게 길을 물어보니 출발할 수 없을 정도로 비가 와 그대로 묵었다. ‘아침에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먹었다는 말을 들었기에 종들을 매질하고 밥한 쌀을 돌려주었다.’ 민폐를 우려해 자신의 종들에게 매를 때린 것이다.

‘6월 5일. 초계군(현재 경남 합천군 초계면)에 거처할 방을 도배한다. 그날 아침 구례 사람과 하동 현감이 보내 준 종과 말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백의종군일지라도 업무에 필요할 법한 인력과 말을 모두 되돌려 보냈다는 내용이다. 비슷한 시기, 정혜사 승려 덕수가 미투리(신발)를 받아 달라고 간청한다. 여러 차례 거절하다 한 켤레라도 정성이니 받아달라고 하자 미투리 값을 따로 보낸다.

그런 이순신을 가장 신뢰하고 존경한 이들은 다름아닌 백성들이었다. 그렇기에 이순신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으러 조정에 끌려갈 때 백성들이 울부짖으며 “대감 어디로 가십니까? 인제 우리들은 모두 죽은 목숨입니다.”라 했고 백의종군으로 돌아오자 “다시 오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살았다.”며 기뻐 눈물을 흘렸다. 자발적 지원이 뒤따른다. ‘1597년 9월 17일. 어외도(전남 신안군)에 이르니 피난선이 무려 삼백여 척이 먼저 나와 있었다. 우리 수군이 크게 승리(명량대첩)한 것을 알고 서로 다투어 치하하고 또 많은 양식을 가져와 군사들에게 주었다.’

속전속결, 탱크주의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대통령과 편집보도국장 토론회’에서 새만금 사업이 지연되고 있는 것에 대해 답변하며 “19년 걸려서 겨우 방조제가 생겼는데 나 같으면 그렇게 오래 안 끈다.”고 말했다. 총예산 22조2000억 원이 들어가는 4대강사업도 초고속으로 진행됐다. 2008년 사업추진결정, 2009년 8월 마스터플랜 발표, 2009년 11월 대통령 참석 기공식이 진행되었다. 그 사이에 정부 합동보고대회, 지역설명회, 전문가 자문, 공청회, 환경영향평가가 모두 속전속결로 끝났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 10월 수중보 4곳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대통령이 참석했다.

‘서울시정에 경영마인드를 접목하여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21세기 새로운 경영행정을 펼쳐나갈 것’이라고 공언한 대로 오물과 악취가 넘쳐나는 청계천을 뒤바꾸는 복원사업을 2003년 7월 1일 첫 공사를 시작해 2년 3개월 만인 2005년 10월 1일 준공시켰다. 서울시장 시절의 업적을 바탕으로 이명박의 지지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이를 계기로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가 됐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이명박 대통령을 “반만년 역사 최고의 도시계획가”로 극찬했다. 세종대왕과 정조를 뛰어넘는 영도자로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서울시장 후임자인 박원순의 생각은 다르다. ‘청계천 복원은 탁월한 선택이었지만, 생태적 역사적 시각이 결여돼 있었던 것은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임기 내에 대형국책 사업을 모두 속도전으로 끝내려는 노력은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

세종의 토론정치

세종은 1472년 과거시험 문제에 ‘세제개혁’에 관한 사항이 담기길 원했다. ‘다스림을 이루는 요체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했다. 백성들에게는 전제(田制, 토지제도)와 공부(貢賦, 국가에서 부과한 현물)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 지방에 파견한 조사관들이 세종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지 않아 몹시 못마땅했다. 이를 개선할 방법을 묻고자 했다. 국가고시의 시험문제로부터 세제개혁을 공론화한다.

조종의 공신들은 찬반으로 나뉘어 의견이 분분했다. 백성들도 의견이 갈리었다. 1430년 3월 세종은 전국 17만2806명의 신민을 대상으로 공법 찬반여부를 조사했는데, 9만 8657명이 찬성했고, 7만 4169명이 반대했다. 반대론자의 대표 격이었던 영의정 황희의 의견은 이렇다. 비옥한 토지는 대체로 부자가, 척박한 토지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데, 만약 중간 수준에서 세금을 매기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공법에 반대한 것이다.

세제개혁 찬성론자들은 아전의 농간이 심각하고 뇌물을 받은 조사관들의 낮은 세액 책정으로 국가재정이 고갈되어 새로운 객관적 기준을 반영한 공법(貢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이 민감한 찬반양론을 어떻게 조율했을까? 1차 여론조사를 실시했더니 토지생산력이 낮은 함길, 평안의 경우 찬성 1410 반대 3만5912로 반대편이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경상, 전라에서는 찬성 6만 5864 반대 664로 찬성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전체 투표결과는 찬성으로 결론을 낼 수 있었음에도 세종대왕은 밀어부치지 않는다.

세종은 뜻밖에 ‘제2차 여론조사’ 검토를 지시한다. “나는 경상, 전라 양도의 인민들 가운데 공법의 시행을 희망하는 자가 많다고 들었다. 이제 이 지역의 민간을 방문하여 백성들 가운데 희망하는 자가 2/3가 되면 우선 이들 두 도에 시행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신하들에게 토론할 것을 요구한다. 요즘 표현으로 압도적 다수(투표자의 2/3)가 원하는 지역에서 ‘시범사업’을 해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민생에 직결되고 후대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칠 사안에 대해서 모두가 원만한 합의에 도달하도록 서두르지 않았던 것이다.

17년의 기다림

백성과 신하들이 모두 납득할 결론을 내릴 때까지 세종은 시간별 지역별 안배로 조사와 토론의 속도를 조절한다. 속전속결을 버리고 천천히 함께 가는 설득과 동행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면서 세제 개혁안의 보완책을 마련하고 개혁에 대한 불안감을 가진 백성과 신하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토론과 연구조사를 지시한다. 그렇게 정책의 후유증과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한편 민주적 절차를 밟아 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세종은 전국적인 여론조사와 사대부들의 찬반토론, 어전회의 등에서 점차 찬성이 높아졌음에도 6년간 보류상태를 유지한다. 그 사이 그는 척박한 토지에 무거운 세액이 책정되지 않도록 하는 대안과 흉년이 들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공법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하게 했다. 마침내 1444년 그동안 반대의견을 굽히지 않았던 황희, 맹사성 같은 신하들까지 공법 실시에 ‘전원찬성’하게 되었다. 1427년에 과거시험으로 시작해서 1444년 어전회의로 최종결정에 도달, 17년이 걸렸다.

현행 대통령제의 권한이 막강하다고 하지만 조선 초기 임금의 권력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세종이 17년을 기다린 것은 임기가 종신토록 보장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지 않는다. 다른 조선의 임금들이 모두 세종의 전례를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후대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칠 사안에 대해서 임기를 넘겨서라도 토의하는 문화를 계승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묻게 된다. 스위스는 알프스를 관통하는 터널 공사를 놓고 40년 가까이 논쟁하고 네 번의 국민투표를 거쳐 단계적으로 시행했다.

제주도 강정마을을 한반도의 끝이 아닌 육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등한 지리적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의 칼날은 외적을 향했지만 행정의 손길은 백성들과 따뜻하게 맞잡았다. 신뢰를 높이고 저절로 따르도록 먼저 실천했다. 세종대왕은 절차와 명분 모든 것을 손에 쥐고도 17년 동안 민주적 토의와 정책의 완성도를 높여 마지막에는 어전회의의 만장일치를 이끌어냈다. 정부와 해군도 역사에서 배우라. 성군과 성웅이 어떻게 백성들과 함께 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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