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耳順)의 골목길
이순(耳順)의 골목길
  • 박성우 시인(우석대 교수)
  • 승인 2012.04.01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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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봇대 18

이순(耳順)의 골목길 - 전봇대 18

 

 

 

 

 

 

                                                                                                  김장호

예전 이문동 막다른 골목길
대문 앞에 연탄재 쌓인 어느 슬레이트집에
아비는 밤에 리어카로 이삿짐 옮겨간 적 있다
(중략)
골목길은 도시의 실핏줄
배급이 가장 늦어지던 골목에는
두부장수의 구수한 종소리와 젓갈장수의 짭조름한 목소리가 찾아들었고,
연막소독차의 요란한 소리에 뛰쳐나가면
밥 묵고 나가라!는 어미의 볼멘소리가 마악 뒤따랐다

골목길은 도시의 풀뿌리길
다들 저녁 설거지 서둘러 끝내고
나팔꽃이 휘감고 올라간 나무전봇대 외등 밑에서
귀 쫑긋 라디오 연속극 들으면서 귀로 세상을 읽었던 골목길 사람들,
무거운 새벽이슬을 차며 큰길로 세상으로 나아갔다

골목길은 도시의 팔자주름
허구한 날 을지로 인쇄소 골목에서
십육절 전단을 찍어주었던 울 아비
기분 좋은 밤이면 붕어빵 사들고 옛 노래 흥얼거리며 골목길 접어들다가,
전봇대에 기대어 붕어빵 삼남매 소리쳐 불러보시곤 했다

젯날, 이순의 골목길 걸으면
아비의 목소리가 맥놀이치며
누런 두루마리 휴지처럼 자꾸만 따라나온다

작품출처 :  김장호, 『전봇대』

■ 리어카로 이삿짐을 옮겨야하는 막다른 골목길은 얼마나 좁은 골목길이었을까요. 그 슬레이트집 지붕 밑에는 몇 가족이나 살고 있었을까요. 거기서 뛰놀던 조무래기들은 이제 ‘이순(耳順)’ 이쪽저쪽의 나이가 되었겠지요.
“예전 이문동 막다른 골목길”의 소란스런 풍경은 그야말로 흑백사진이 된지 오래이겠지만, 여전히 “두부장수의 구수한 종소리와 젓갈장수의 짭조름한 목소리”도 들려오고 “나무전봇대 외등 밑에서/ 귀 쫑긋 라디오 연속극 들으면서 귀로 세상을 읽던” 골목길 사람들도 잘 보입니다. 맞습니다. “골목길은 도시의 풀뿌리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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