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S Map으로 본 서울시 지형과 산책길
GIS Map으로 본 서울시 지형과 산책길
  • 송규봉 객원논설위원
  • 승인 2012.04.08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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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걷는 산책길 “어쩌다 한순간 나타나는, 딴 세상”

숲 속, 쓰러진 소나무

▲쓰러진 소나무. [사진=송규봉 객원논설위원]
자주 걷는 숲 속 산책길에 사건이 벌어졌다. 두 팔로 다 안을 수 없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산책로 위에 쓰러졌다. 머리는 동편으로 떨어졌다. 훤칠하게 잘 생긴 나무였다. 수십 년 한 자리를 지켜온 세월의 마지막은 싸늘하다. 땅 위에 직각으로 우뚝 서 있던 자태는 이제 하늘과 나란히 땅 위에 길게 모로 누웠다. 해년마다 초봄에 몇 그루씩 만나게 되는 풍경이다.

늦여름,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나무들은 부러지거나 뽑힌 채로 처연하다. 꺾인 줄기는 생살이 찢겨 피폭 당한 빌딩을 연상케 한다. 태풍에 뽑혀 쓰러진 나무들의 뿌리는 격렬했던 생존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곳곳에 출혈의 흔적이 있고 끊어진 뿌리와 뿌리 사이에는 선연한 속살이 드러난다. 폭탄이 떨어져 파인 땅을 연상케 한다.

태풍을 견딘 거목이 가녀린 봄기운에 쓰러지는 것은 역설적이다. 숲 속 땅이 봄볕에 녹다가 한밤에 얼고, 다시 언 땅이 풀리는 즈음에 쓰러지는 것이다. 초봄에 쓰러진 나무들의 뿌리를 보면 쓸쓸하고 허약하다. 뿌리는 병색 짙은 쇠락함이 묻어난다. 이 나무가 겨울을 버틴 것은 뿌리의 힘이 아니라 얼음의 힘이었으리라. 사망시점은 몇 달 전 겨울 한복판이었을 터. 이런 날 숲 속 산책은 힘들다. 상가집 문상객 같은 마음이 된다.

묵은 산, 묵은 산책로

이 숲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세상살이가 가장 힘겨울 때였다. 어디에도 시원한 답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회사는 어려웠고 동료들과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마음 속 바람 잘날 없이 하루하루 뿌리째 흔들렸다. 희망이 있기에 걷는 것이 아니라 무작정 걷기라도 해야만 했다. 마음속에 큰 바람이 부는 날엔 정상까지 가파른 산길을 탔다. 잊고 견디고 지치기 위해 걸었다.

일부러 다른 산에는 가지 않았다. 같은 산 같은 산책로를 걸으면 내 마음의 퇴적층을 더 잘 볼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 혼자 가게 된다. 여럿이 매번 새로운 산에 간다는 것은 그 자체를 즐기는 경우에 행복하다. 그러나 스스로 정리하고 답을 찾아야 할 때, 새로운 산행은 눈과 마음을 앗아간다. 둘 이상이면 코스, 보폭, 대화까지 온통 상대방에 신경을 써야 한다.

매번 같은 산책로를 걸으면 지나간 마음의 행로를 되짚을 수 있다. 얽히고설킨 생각의 지도를 그리며 지금의 위치를 되짚게 해주었다. 그러니 늘 보던 바위, 잡목, 나무, 숲길이지만 지루할 겨를이 없다. 오히려 쓰러진 나무를 한 눈에 알아보는 것처럼 이전과 다른 사건을 만나게 된다. 새로운 산에서는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묵은 산 묵은 산책로의 묘미다.
그 시절,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정하는 것은 무엇을 할 지 정하는 것만큼 절실했다. 덧셈 방정식은 뺄셈과 더불어 겨우 완성되었다. 산행과 더불어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 산행이 거듭될수록 배낭은 가벼워졌다.

바리바리 배낭 가득 고민을 채워가던 날들이 지나고 심신은 한결 가벼워졌다. 일을 하듯 계획을 짜서 정상까지 다녀오던 코스는 점점 느려지고 짧아진 대신 체류시간은 길어졌다. 정상에 오르는 일은 드물어졌다.

지난 여름,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하루 종일 숲 속에 머무는 경우가 많아졌다. 등산로 입구를 지나면 세상 소음은 점점 등 뒤로 물러나고 산속 바람소리의 볼륨은 높아진다. 산행과 더불어 바람의 리허설을 듣는다. 숲 속으로 한참 들어가면 방음시설이 뛰어난 공연장 같다. 숲 속에서 비로소 햇볕은 진정한 조명이 되고 나무들은 현악기, 계곡물은 타악기가 된다. 숲 속을 튕기며 고음으로 퍼지는 새소리는 그대로 금관악기가 된다. 산허리 어디에나 계곡에 자리를 잡고 발을 담그면 바람은 본격적인 지휘를 시작한다. 눈만 감으면 최고의 오케스트라 연주가 산 전체에 울려 퍼진다.

서울시 선정 ‘봄꽃길 102선’

“펑!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공중 가득 흰 꽃팝 튀겨 놓은 날 잠시 세상 그만두고 그 아래로 휴가갈 일이다. 눈감으면; 꽃잎 대신 잉잉대는 벌들이 달린, 금방 달아갈 것 같은 소리 ? 나무 한 그루 이 지상에 유감없이 출현한다.

눈 뜨면, 만발한 벚꽃 아래로 유모차를 몰고 들어오는 젊은 일가족; 흰 블라우스에 그 꽃그늘 받으며 지나갈 때 팝콘 같은, 이 세상의 한때의 웃음.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장사 가는 벚꽃길; 어쩌다 한순간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우리, 여기서 쬐끔만 더 머물다 가자”? 황지우,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황지우 시인에게 대산문학상을 안겨주며 황동규 심사위원이 한마디 남겼다. “혁명을 통한 화엄이 아닌, 지상의 삶 속에서 화엄을 찾아낸 것이다. 그것이 영원이 아닌 ‘쬐금’의 시간일지라도 그것은 의미에 따라서는 영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일 수가 있다.”
거대담론을 버리고 삶의 미세한 의미를 시 속에 환한 사진 한 장으로 담아놓은 것에 대한 칭찬이었다. 그런 장면을 시인만이 느끼고 마음에 새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봄 길을 걸으면 ‘쬐금’ 동안이라도 모두 시인이 될 것이다.
서울시가 봄을 맞아 ‘서울 봄꽃길 102선’을 발표했다. 꽃 나들이 간다고 멀리 내장사, 광양, 진해까지 갈 것 없이 서울의 봄꽃길을 즐겨봐도 좋겠다. 총 102곳 181.1km(공원 39곳, 가로 30곳, 하천변 28곳, 기타 5곳)나 된다. 서울시가 만든 하이서울뉴스(http://inews.seoul.go.kr)에 자세히 소개하니 어디든 가까운 곳을 찾아보면 좋겠다.

시민 96%, 걸을 거예요

산림과학원과 충북대 연구팀이 숲길 걷기의 정신적 효과에 대해 공동연구를 발표했다. 20대 남녀 60명을 대상으로 숲길과 도심을 걷게 한 뒤 정신적 심리적 상태를 조사했다. 숲길을 걸은 후 20% 이상의 인지능력이 향상됐고 우울감, 분노, 피로감, 혼란 등의 정서가 긍정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반면 도심을 걸은 조사 대상자들은 인지능력이 둔화되고 정서와 감정도 부정적으로 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대상자들의 인지능력은 ‘선추적검사(Trail B)’라는 방식으로 측정하고 정서와 감정은 기분상태 척도(Profile of Mood State)라는 검사지로 평가했다. 이들 검사지는 정신의학계와 심리학계에서 흔히 사용되는데 국제적으로도 통용되는 방법이라고 한다. 숲길이 정신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는 녹색, 빛, 소리, 공기 등 다양한 물리적 환경이 인간의 스트레스와 심리적 피로감을 감소시켜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걷기의 신체적 효능은 훨씬 더 많은 연구결과로 발표되었다. 특별한 장비나 경제적인 부담도 없고 부상의 위험도 다른 운동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 장소와 날씨에 구애 받지 않고 매일 할 수 있으며 650개 근육과 206개의 뼈들이 거의 모두 균형 있게 사용된다. 장시간 할 수 있고 폐활량과 지구력을 향상시키며 당뇨병과 고혈압에 도움이 크다고 한다.

그러서일까? 서울시민의 도보관광 참여의향은 96%로 압도적이다. 2010년 12월 13일부터 22일까지 서울의 주요 거리에서 1026명을 대상으로 1 대 1 대면조사(서울시 도보관광 활성화에 관한 연구, 2011)한 결과이다. 시민들은 문화역사 체험, 자연경관감상, 사색과 정신적 안정을 위해 걷고 보고 느끼길 원한다고 답했다. 그래서일까, 제주 올레길 도보관광객에 대한 설문조사(관광학연구, 제34권 제4호, 2010)를 보면 서울시민이 33%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람 따라 풍경 따라 발길 따라 잠시 딴 세상으로 다녀오는 것이다.

소로우, “내가 숲속으로 간 까닭은...”

일주일 중 잠깐 잠깐 숲 속에 다녀온다. 숲 속에 사는 삶은 어떨까 궁금해 다시 ‘월든(Walden)’을 꺼내본다. 소로우의 출발은 숲이 좋아서가 아니라 마음의 부유함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출발한다. “가장 현명한 사람들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보다도 더 간소하고 결핍된 생활을 해왔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및 그리스 철학자들은 외관상으로는 그 누구보다 가난했으나 내적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소로우는 ‘자발적인 빈곤’을 선택하지 않고는 인간 생활에 대한 공정하고도 현명한 관찰자가 될 수 없다고 내다봤다. ‘오늘날 철학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며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 심오한 사색을 한다거나 어떤 학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소로우가 만나고 싶은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고 그것의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너그럽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나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가 ‘월든’이라는 호숫가 숲속으로 들어간 목적은 그곳에서 생활비를 덜 들여가며 살자는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되도록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내 개인적인 용무를 보자는 데’ 있었다. ‘어떻게 하면 정직한 방법으로 생활비를 벌면서 동시에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추구할 자유를 가질 수 있을까’하는 해법을 찾고자 숲 속으로 들어갔다.

문명은 건축물을 그렇게 찬란하게 변모시켜왔으나 그 안의 사람은 그런 수준으로 변모해왔는가? 소로우가 던지는 질문이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고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 불가피하게 되지 않는 한 체념의 철학을 따르기는 원치 않는다.”

숲에 더 자주 가보자

스물일곱 나이에 영적 독립의 전환점을 추구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그가 잠시 등진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듯, 나도 숲 속을 가끔 산책하는 도시인의 무리에 속해 있다. 그가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 살았다고 해서 당대 도시 사람들이 모두 하찮은 것은 아니었을 터. 아직은 그처럼 살길 원치도 않고 그처럼 살 수도 없다. 내가 그를 찬양하건 폄하하건 그는 그대로 그고 나는 나대로 나다.

광고인 박웅현 디렉터는 마흔 즈음의 삶을 이렇게 되돌아본다. “불혹은 무슨 만혹(滿惑)이지 (중략) 내가 지켜야 할 의무만이 날 죄고 있는 현실의 벽이 크게 느껴지면서 다른 생에 대한 동경이 커졌어요. 답은 여기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다고 믿었죠.” 그에게 불혹은 사십대가 지나고 쉰 즈음에나 찾아왔다고 한다. “남들은 지천명(知天命)이라는데 전 이제 불혹을 맞았어요.”

직장 다니고, 일하고, 도시에서 바삐 살아가는 뻔해 보이는 삶에도 색다른 풍경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광고에 인문학을 담아왔다는 평가를 받는 박웅현 디렉터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이제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 다른 곳에 답이 있는 걸 알지만 이제 여기에도 답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내가 사는 이 삶을 잘 살면 답이 나온다는 걸 이제 알아요. 다른 어떤 생에 대한 동경도 없어요. 큰 부자, 사회적 명예와 성공보다 집 앞 공원을 지나면서 풀을 보고 초록을 느끼는 내 삶, 내 인생이 좋아요.”(박웅현, 책은 도끼다, 북하우스, 2011, 305쪽)

‘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기적 아녀 ’ 황지우의 <발작>이라는 시다. 익숙한 초록빛에서 새삼 놀라는 것은 시인들만의 것은 아니다. 글을 쓸 때 마다 인용구가 많아지고 길어진다. 나만의 독특하고 자립한 사고와 문장이 제대로 없다는 반증이다. 전업 작가도 아닌 직장인의 한 명으로 그래도 해보고 싶은 것은 읽어서 좋았던 구절을 주변에 나누는 것이다. 내 친구는 좋은 음악을 나누고 싶을 때 따로 묻지 않고 내 귀에 헤드폰을 씌워주곤 한다. 숲에 더 자주 가보시라 권유하는 것도 내 친구에서 배운 것처럼 따로 묻지 않고 귀에 씌워주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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