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기계’, 사진작가 노순택
‘망각기계’, 사진작가 노순택
  • 정민희
  • 승인 2012.05.1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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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순택, 망각기계 2007, Archival pigment print

2002년부터 매년 역량있는 한국대표 사진작가에게 주는 동강사진상의 11회째 수상자 노순택. 그의 작품 소재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생활의 재현이 아니다. 정치학 전공의 기자출신답게 다큐멘터리 사진의 전형적인 틀 위에 예술적 감각을 더하고 있다.

5월은 계절의 여왕답게 온 세상이 화려한 꽃의 옷을 입는다. 싱그러운 생명력의 나무들은 울창하게 다시 살아난다. 이처럼 자연은 다시 깨어나고 항상 우리 곁에 있다. 그렇지만 더없이 아름답기 때문에 이 계절을 더 가슴깊이 묻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5월 광주항쟁의 유족들이다.

30여 년이 지나 이제 죽은 이는 잊혀지고 참혹한 일을 겪은 이들의 기억은 가려지고 있다. ‘조국의 민주, 자주, 통일을 위한’, ‘이 땅의 역사에 빛과 소금의 역할’ 이것이 5월 광주에 대한 ‘공식적’ 기억이다. 노순택의 사진은 과거를 서술하고 역사의 기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작가가 저술한 <분단의 향기>, <좋은 살인>, <망각기계> 등을 통해 한반도의 분단문제와 갈등의 풍경을 엿볼 수 있다. 한 걸음 나가 그러한 역사를 은폐하는 장면까지 그는 사진과 글로 그려낸다.

5·18 기념공원의 사진작가로 선정된 뒤 6년 남짓한 시간 동안 꾸준히 망월동 옛 묘지의 영정사진들을 기록했고 광주항쟁과 관계있는 장소와 사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사진 속에 담았다. 광주에서 20km거리의 화순 운주사의 초상사진을 기록한 것 역시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이 곳에 들러서 아픔 마음을 달래곤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이다. 산과 들에 널브러진 불상들, 얼굴이 뭉개져 형태가 없어진 와불(臥佛)을 보며 광주 금남로에서 죽어간 가족과 친구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구제할 수 없었던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먼 미래에 등장하는 부처다. 운주사에서 거꾸로 누워있는 와불이 제대로 일어서는 날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전해져오는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유가족은 믿었을 것이다.

흑백사진으로 음산하고 괴이한 죽음의 분위기를 긴장감있게 자아내는 노순택의 사진에는 예술이 주는 또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 윤리와 정치, 역사적 문제 등의 무거운 질문을 통해 잊혀져가는 역사를 재현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농축된 개념이 사진예술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노순택 사진전 ~6월 10일. 학고재갤러리 신관. (02~739-4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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