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S Map으로 본 서울의 정치·시민·노동단체
GIS Map으로 본 서울의 정치·시민·노동단체
  • 송규봉 객원논설위원·주식회사 GIS United 대표
  • 승인 2012.05.18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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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눈물, 그리고 ‘공동선’을 담을 그릇의 크기

1980년 5월
광주시에서 전남 벌교읍까지는 70km의 거리입니다. 그해 5월, 사촌형은 광주에서 걸어서 벌교의 우리집에 왔습니다. 공수부대가 도시를 장악하고 시민군이 총을 들었던 때입니다. 광주에 있다가는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어 무서웠다고 했습니다. 친구 몇 명과 산길을 걸어 광주를 빠져 나와 산길로 산길로 벌교까지 걸어왔다고 했습니다.

저녁 식탁 너머로 우리 가족은 TV, 라디오, 신문에서는 알 수 없는 광주의 실상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공포에 떨었습니다. 국민학생이던 저는 도대체 무슨 사연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교과서와 TV 드라마에서 보고 들은 대한민국 군인이 대도시에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선생님의 풍금에 맞춰 ‘해당화가 곱게 핀 바닷가에서’ 동요를 열심히 불렀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가방을 집어 던지고 누나가 찾으러 올 때가지 천방지축 놀았습니다. 집 가까이 갯벌에서 홍게와 도둑게를 잡고 망둥어 낚시를 하며 땅거미가 내려올 때까지 놀았습니다.

1987년 5월
87년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캠퍼스에 집회가 많았지만 저는 용케 피해 다니며 도서관 귀퉁이에 앉아 대학생 티를 내고 있었습니다. 가끔은 미팅도 나가고 친해진 신입생들과 서울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습니다. 3월, 4월이 가고 5월이 왔습니다. 중앙도서관에서 문리대로 돌아가는 기다란 게시판에 광주의 사진들이 걸렸습니다.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습니다. 남미나 아프리카의 내전에서나 볼 수 있는 사진들이었습니다. 사진 속의 인물들은 눈, 코, 입이 없거나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단도를 착검한 소총과 야구방망이 길이의 곤봉 그리고 탱크가 등장했습니다.

펄럭이는 대자보 끝자리에 분향소가 차려졌고 그 옆에 독일어를 말하는 리포터의 긴박한 목소리 아래 5월의 영상이 떠다녔습니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는 스크럼에 동참하지도 못하고 머뭇머뭇 기나긴 행렬을 어정쩡하게 따라가 보았습니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고학년 선배가 전투경찰 코앞에서 쩌렁쩌렁 연설과 구호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전투경찰의 방패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화단 위에 서서 스크럼 머리 위에 하얀 축포처럼 쉴 새 없이 터지는 최루탄을 속절없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1993년 5월
의정부교도소 시국사범 특별사동에도 봄은 찬란했습니다. 15척 담장 너머로 허리 잘린 수락산의 봄빛을 몇 시간이고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간간히 안기부 남산 조사실의 수사관이 꿈에 나타나곤 했습니다.
‘김일성 장군가’를 부르지 못한다고 구타를 당하거나, 북한방송 청취를 실토하라고 맞을 때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수배 중인 친구의 은신처를 제 손으로 약도에 그려준 것입니다. 그것도 삼 일만에요. 간간히 꿈속에 친구가 자취방에서 끌려가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부처님이 오신 5월 어느 날 대통령 특별사면이 있었습니다. 옥문 밖으로 나와 연등이 켜진 거리를 걸었습니다. 그날 모교에서는 ‘출소환영식’이 열렸고 선후배들은 저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소망대로 4년 만에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저녁을 먹고 집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해 5월, 그때까지 잡히지 않고 도망 중인 친구를 어렵게 만났습니다. 그 친구 앞에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 했습니다. 영문을 모르던 친구는 저를 일으켜 세우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네가 잡히지 않아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말해주었습니다. 흐르는 눈물이 비참했습니다.

1997년 5월
의원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갔습니다. ‘저, 한 달 휴가를 다녀오려 합니다.’ 신문을 보고 있던 김근태 의원은 눈을 들어 제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잠시 말이 없었습니다. ‘다녀와.’ 이유는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해 5월, 배낭을 메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습니다. 작은 수첩, 볼펜 한 자루, 책 한 권, 김밥 한 줄을 배낭에 둘러매고 이 산 저 산 종일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산마루에서 굽어보는 서울은 바쁘게 돌아가는 데, 저는 속절없이 자동차와 사람들과 건물들을 굽어보다 해가 질 무렵 내려오곤 했습니다.

뭐 하나라도 제대로 잘 하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짜 하고 싶은 마음의 넘버원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이 잘 맺어지는 그런 분야를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사표를 냈습니다.

2000년 5월
지도교수 데이나 탐린(Dana Tomlin) 박사가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GIS 연구소에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GIS 과목 중 석박사 과정의 조교를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단돈 몇 푼이 절박해 무작정 하겠다 했습니다.

컴퓨터 지도만 그렸습니다. 환경법과 환경영향평가 과목에 더 많은 시간을 배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 지도(GIS)에 쏟는 시간은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지도 속에 오래 들어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석박사 과정을 듣던 미국친구가 다른 연구소에 추천을 해주었습니다. 연구원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시와 복지를 다루던 연구소에서 부동산과 유통을 다루는 경영대학원 산하 연구소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2003년 5월
인천공항에 내린 다음날, 일하기로 한 GIS 벤처회사를 방문했습니다. 애초 한두 달 쉬자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열정과 의욕이 넘치는 동료들의 틈바구니에 얼른 끼고 싶었습니다. 동료들은 따뜻하게 GIS 전공자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벤처의 진로는 열정과 의욕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객을 확보해 자금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아직 먹고 살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월급은 서너 달씩 밀리기 일쑤였습니다. 초창기 의욕은 꺾이고 책임론이 나왔습니다.

학생운동 출신의 주주들은 논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둘로 셋으로 갈리고 서로 책임을 물었습니다. 비전과 전망이 아닌 책임과 감정으로 싸움은 격해졌습니다. 급기야 가장 뛰어난 프로그램 능력을 가진 임원이 회사 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명분과 대의만 있어도 괜찮던 이십 대에서 이해관계와 돈과 경영을 다루는 삼십대로 옮겨가야 했습니다. 6개월을 고사하다 회사가 둘로 쪼개 질 상황에 하는 수 없이 연장자라는 이유로 회사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겨우 컴퓨터 지도를 배웠지만 경영은 완전히 문외한이었습니다. 가끔 혼자 울어야 했습니다.

2009년 5월
삼 년 동안 대표 자리를 맡는 동안 심신은 방전되었습니다. 가슴에는 사막화 현상이 뚜렷했습니다. 마음속에는 모래바람이 서걱거리고 풀 한포기 자랄 수 없는 메마른 풍경이 이어졌습니다. 더 이상 업무가 아니라 사람들 때문에 한걸음도 나갈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를 끌고 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제가 내뱉는 언어들은 살벌했습니다. 냉소적이고 피곤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예사되었습니다. ‘행복하세요?’ 어느 날 동료가 물었습니다. ‘처음 맡을 때부터 행복한 적은 없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내뱉고 다음날 사표를 냈습니다.
쉬엄쉬엄 마음을 다스려야 했던 나날, 친구랑 봉하마을에 내려갔습니다. 청와대에서 5년을 보낸 선배가 그 마을에 있었습니다. 먼발치로 농부들 틈 속에 전직 대통령을 보았습니다. 오후 2시, 수백 명의 관광객들이 대통령의 관저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박수 속에 전직 대통령이 나와 인사를 하고 농담을 주고받았습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한 어린이가 번쩍 손을 들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대통령이 될 수 있어요?’ 사람들이 하하하 웃었습니다.

‘글쎄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오늘 해줄 수 있는 말은 작은 거 하나부터 열심히 잘 해보면 어떻겠나?’ 방문객들 틈 속에 전직 대통령은 행복해 보였습니다. 방문객들이 모두 떠나고 선배와 짧은 산책을 나섰습니다. 조만간 서울의 형수와 아이들이 김해로 내려올 거라 했습니다.

그렇게 봉하마을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대통령은 칩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방송국의 카메라가 대문을 주시하고 검찰청에서는 출두요구서를 보냈습니다. 실시간으로 전직 대통령의 움직임이 생방송으로 보도되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봉하마을은 통곡소리 가득했습니다.

2012년 5월
진보정당의 회의장에는 대한민국 방송 카메라가 모두 모인 것 같았습니다. 호텔 스위트룸, 스님들의 동영상이 대한민국 방송국 뉴스를 타고 가가호호 전달되었습니다. 다른 달도 아닌 5월에 말입니다.
엉뚱하게도 자살자가 가장 많은 달이 5월이라는 통계를 떠올렸습니다. 가장 찬란한 계절에 가장 비참한 일들이 터져 나오는 이치를 잘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꽃망울의 화사함과 세상사의 그늘이 대비되는 격차에 놀라게 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스무 살 5월에 스크럼 물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오신 날,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치 저의 한해 한해는 1월이 아니라 5월에 시작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위대한 가치들은 밤하늘의 별자리 같은 건가요? 별과 별 사이 대책 없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만 빛나는 것인가요?

그 어두움을 배경으로 해야만 더 빛나게 되는 한 쌍의 운명인가요? 종교, 정치, 노동운동, 시민운동은 모두 공동선을 갈파합니다. 민중의 삶에서부터 우주의 끝자리까지 다룹니다. 민족, 민주, 통일, 평등, 해방, 자유를 다룹니다.

안타깝게도 공동선은 자신의 그릇만큼만 담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앞에 숙연해집니다. 수신제가는 어렵고 치국평천하는 쉽다는 말을 떠올립니다. 자기를 다루는 것은 가깝기에, 구체적이기에 어렵다 했습니다. 나라와 세계는 멀리 있기에 만져지지 않아서 오히려 쉽다고 했습니다.

먼 옛날, 그리스에 현자가 살았다고 합니다. 정치인이건 상인이건 군인이건 답답하면 그 현자가 사는 동굴에 찾아가 ‘지혜로운 말’을 듣고자 했답니다. 현자는 의뢰인의 말을 다 듣고선 종종 다시 동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라 했습니다. 동굴 입구 위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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