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열 환경재단 대표의 환경운동 30년
최열 환경재단 대표의 환경운동 30년
  • 이인우 기자
  • 승인 2012.06.03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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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환경단체, 아시아 하나로 묶는 허브 역할”
▲최열 환경재단 대표는 31일 아시아 환경운동 활동가들과 아시아 환경네트워크를 조직했다. [사진= 이원배 기자 c21wave@seoultimes.net]

우리나라에서 환경운동이 시작된지 30년이 흘렀다.

환경재단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30, 31일 양일간 서울상공회의소에서 환경운동 30주년 심포지엄을 열었다.

공해라는 말조차 낯설던 1982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라는 씨앗이 발아했다.

5공 정권의 시퍼런 서슬에 시민들 목소리가 잦아들던 율렬한 시절이었다. 당시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만들고 이끌었던 최열 환경재단 대표를 만났다.

작지만 단단한 몸피에 선 굵은 눈매와 입매… 평생 운동가로 살아온 이력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미뤄 알 수 있었다.

세상의 시민운동가 대부분이 그렇듯 최 대표도 친절하면서 가볍지 않고 다변이면서 듣는 상대방을 끊임없이 의식했다.

한 마디라도 허투루 흘리지 않도록, 단어 하나하나 꼭꼭 눌러 담아 몸피보다 묵직한 메시지를 전하려 애썼다. 바로 이런 게 운동가의 어법이려니 했다. 이렇게 나누고 소통하며 환경운동의 한 걸음 한 걸음 이어온 세월이 벌써 30년이다.

현장에서 찾는 단체의 역동성

최 대표는 환경운동연합 등 환경단체의 역동성에 대해 ‘현장’이라는 키워드를 꺼냈다.

그는 “직접 현장에 자주 나가는 것만큼 진보적인 것은 없다”고 단언했다. 현장에서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함께 부대끼며 보조를 맞추다보면 자연히 새로운 틀을 만들기 위한 층계를 쌓게 된다. 이보다 명쾌한 진보에 대한 정의를 들어본 것도 참 오랜만이다.

그는 1976년 처음 환경운동을 구상했다. 영어(囹圄)에 갇힌 시절이었다. 1975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김승훈 신부 등과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해 안양교도소에서 4년을 복역했다.

최 대표는 “대학에서 전공한 농화학을 살려 사회에 기여할 일을 찾다가 공해 문제를 생각하게 됐다”며 “당시 국내에 공해 관련 서적이 없어 일본어를 독학한 뒤 일본 전문서적 250권을 읽었다”고 회상했다.

또 노자와 장자에도 심취했다. 그 때 얻은 교훈이 ‘생명을 중시하면 이익을 가벼이 여기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말하는 생명은 인간을 넘어선 지구의 모든 동·식물을 아우르는 ‘뭇 생명’이다.

최 대표는 “정치는 사람만을 중심으로 하지만 환경운동은 그 지평을 넓혀 모든 생명과 이들이 연루된 미래까지 한 영역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치는 곧 권력을 말한다. 세계의 권력은 모두 사람 문제만 집착한다. 이러한 집착의 이유를 최 대표는 또 한 번 명쾌하게 해석한다. 정치인들은 사람을 ‘표’로 생각하고 투표권이 없는 생명은 안중에 두지 않는다는 풀이다. 정치는 그래서 미래 문제는 별 가치를 두지 않는다.

개발논리 시대,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첫발

그는 출소 후 4년이 지난 뒤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세웠고 이후 ‘공해추방운동연합’을 구성했다. 공해라는 말이 낯설었던 80년대 이 단체는 안양천과 중랑천, 멀리 울산 등을 답사하며 지역 주민 지원사업을 펼쳤다.

최 대표는 “1985년 울산 온산공단 주민 1만여 명 가운데 700여 명이 관절 통증을 호소하는 ‘온산병’ 등 산업공해를 이슈화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후 맹독성 농약문제와 인스탄트식품 첨가물, 합성세제의 피부 부작용과 하천오염 문제까지 하나하나 굳게 닫혔던 빗장을 열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없이는 환경운동을 더 확대하기 어려웠다.

그는 “80년대 후반부터 시민들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장바구니 들고 다니기 운동과 폐식용유로 비누 만들기, 1회용 안쓰기 운동 등을 벌였다”고 설명했다. 지금도 시민의 생활 속 환경운동으로 으레 손꼽는 아이템이다.

이후 1987년 6·10 민주항쟁으로 5공화국 시대를 끝내면서 환경운동에도 탄력이 붙었다. 많은 지식인과 학생이 동참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93년 8개 공해문제 단체가 모여 환경운동연합을 탄생시켰다. 첫 공동대표는 소설가 고 박경리 여사와 고 장을병 제1대 성균관대학교 총장 등이었고 최 대표는 실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을 맡았다.

이후 환경운동연합은 개발논리로 무장한 정부와 끊임없는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 중 동강댐 사업 저지 등은 막을 수 있었지만 새만금 방조제와 4대강 사업 등은 끝내 저지하지 못했다.

최 대표는 “지금까지 국민들의 환경의식을 높이고 중요성을 알리는데는 성공했다”며 “하지만 대규모 국책사업을 막지 못한 점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고 털어놓았다.

지구환경 양극화 막는 아시아네트워크 조직

이제 우리나라 환경운동은 환경경영과 기후변화 등의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그는 “지구환경 자체가 양극화하고 있다”며 “이는 기후와 에너지, 물, 식량이라는 순환고리로 연결돼 있다”고 강조했다.

또 이같은 문제는 대규모 국책사업을 진행하는 정치권력에 의해 더 커지게 된다. 정치는 가시적인 성과에 집착하고 결국 정해져 있는 지구의 생태학적 용량을 초과하는 개발에 몰두한다.

최 대표는 “유럽은 산업화를 일찍 마쳤기 때문에 독일 녹색당 등 환경운동가들의 정치세력화가 가능했다”며 “우리나라는 정치민주화에 급급하느라 유럽과 같은 환경 정당이 자리잡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앞으로 정당정치에 직접 뛰어들 생각은 없지만 지원은 얼마든 하겠다는 속내도 털어놓았다.

‘시민 없는 시민운동’의 한계에 대한 세간의 지적에 대한 입장도 밝혔다.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시민운동단체는 ‘폐쇄회로’에 갇혀 결국 자기논리만 주장하다 자멸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민단체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많은 소통을 해야 한다”며 “이외수 씨는 트위터로 135만 명의 팔로워와 소통한다는데 이런 게 바로 소프트웨어”라고 했다. 이런 소프트웨어를 통해 시민의 소통을 늘리고 종당에는 탄탄한 조직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최 대표는 “다양한 소통으로 얻은 결과를 공유하며 행동에 옮겨야 한다”며 “잘못된 국책사업 등이 시행되는 일은 결집된 소수(정치권력 및 관료)가 느슨한 다수를 이긴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이제 환경운동이 국내를 벗어나 세계로 뛰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환경재단은 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환경단체 허브 역할에 나섰다. 이번 환경운동 30주년 심포지엄에서 그는 ‘아시아환경네트워크’를 조직한다.

미국 골드만환경상을 수상한 아시아의 운동가 7명도 이 때문에 초청해 별도 심포지엄을 가졌다. 그는 “이제 울타리를 넓혀야 한다”며 “자신의 나이만큼 외국인 친구가 없다면 국가라는 작은 울타리에 갇힌 것과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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