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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 혁 정치학 박사·동국대 외래강사
  • 승인 2012.10.1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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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추석민심

추석민심을 분석하느라 온통 난리다. 이전 대선 결과들이 추석민심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각 언론사들이 대통령 후보 지지율 여론조사 결과를 앞 다투어 내놓고 있는 가운데 공통되는 결과가 눈에 띈다. 추석을 계기로 반등을 노렸던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이 오히려 ‘급락’으로 나타날 만큼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추석명절의 특징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조상신께 제사를 지내고 어릴 적 동무들과 재회하는,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채워지는 시간이 박근혜 후보에게는 불리했을 것이다. 박근혜 후보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기 때문에 추석 바로 전 급히 과거사에 대한 사과발언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추석민심은 싸늘했다.  

휘영청 밝은 한가위 보름달은 기억을 위한 이정표다. 3천 만 명의 사람들이 보름달을 이정표 삼아 잊고 살던 것들을 향해 시간여행을 했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동의 기억으로 간직한 많은 이들이 재회했다. 서로에 대한 기억과 공동의 것에 대한 기억이 가져다주는 삶의 의미와 관계의 기쁨을 새삼 깨달았다.

기억의 반복 없이는 그 의미와 기쁨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차례 상에서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덕분에 기억은 대를 잇고, 세대의 차이에도 서로는 기억의 공동체 된다. 그렇게 추석은 오래된 시간과 그 시간의 기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우쳐 주었다.    

공동체의 역사란 구성원들이 지닌 공동의 기억이다. 추석민심은 ‘과거사를 역사적 판단에 맡기자’거나 ‘과거보다는 미래를 향해야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대한 의심을 담고 있다. 공동체의 역사는 어떤 시점에서 내려지는 최종적 판단이나 심판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구성원들이 지속적으로 행하는 기억의 대상이다. 지속적인 기억을 통해 역사는 단순한 과거로 전락하지 않게 된다.

역사에 대한 기억은 단순히 향수어린 회상, 혹은 지지나 연민이 아니라 그 의미를 성찰하고 현재화 시키는 과정이다. 그랬을 때 기억은 미래의 비전과 새로운 시작의 토대가 된다. 그러는 한 역사는 기록된 과거가 아니라, 기억된 미래다. 토크빌의 우려는 공연한 것이 아니다. “과거가 미래에 자신의 빛을 던지는 것을 멈춘 이래로 인간의 정신은 암흑 속을 헤매고 있다.” 과거와의 단절이나 기억상실은 현실과 미래에 대한 방향감각을 상실케 한다.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냐의 말은 이제는 진부하게 들린다. “진보는 변화에 달린 것이 아니라 기억에 달려 있다. <중략> 경험을 잘 기억하고 잘 활용하지 않는다면, 유치한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과거를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은 항상 과거를 반복하게 마련이다.”

진부하게 들리는 이 말 속에 박근혜 후보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이 있다. 산타냐가 우려하는 과거의 반복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반복이 아니라 그 사건을 낳았던 사상과 생각의 반복이다. 개별적인 사건들에 대한 사과에도 불구하고 5·16과 유신이 자주국방과 경제발전을 목적으로 하였기에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박근혜 후보에게 국민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당시와 유사한 상황 아래서 박근혜 후보는 어떤 일이 있어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최우선시 할 수 있을까? 혹여 평가는 역사적 판단에 맡긴 채 당시와 유사한 사상적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까? 추석 차례상에 둘러 앉아 사람들은 독재에 관한 기억을 이야기 했을 것이다. 과거를 국민의 귀와 눈으로 듣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민주화된 사회에서 역사를 기억하는 올바른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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