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④ 남산-⑴
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④ 남산-⑴
  • 이인우 기자
  • 승인 2012.10.26 14: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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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딸깍발이는 중정에 끌려갔을까?

‘남산 딸깍발이’라는 말이 있다. 1952년 국어학자 이희승 박사의 수필 ‘딸깍발이’에서 유명해진 말이다. 딸깍발이는 신발이 없어 화창한 날에도 나막신을 신고 다니는 가난한 선비를 부르던 호칭이기도 했다. 남산 아래, 지금의 명동에 이르는 동네는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북촌에 빗대 남촌이라 불렀다.

벼슬을 하지 못한 선비와 무반들이 이 곳에 몰려 살았고 부유한 문신들이 모여 사는 북촌의 대척점을 이루었다. 가난하지만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정절과 기개가 누구보다 높았던 남산골 샌님이 바로 ‘남산 딸깍발이’였다.

딸깍발이들이 모여 살던 동네는 구한말 일본의 침탈이 시작되면서 일본 상인들이 몰려와 자리를 잡았다. 남촌 무반들이 무예를 닦던 예장터(현재 서울유스호스텔 인근)는 왜장터(倭將)가 됐고 그 자리에 일본 공사관이 들어섰다.

일본 공사관 자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중앙정보부로 바뀌었다. 이후 유신정권을 지탱하는 권력의 심장부로 군림했다.

남산은 구한말에서 근대화시기를 거쳐오면서 지금까지 서울의 역사를 증언하고 대한민국이 거쳐온 영욕의 흔적을 아로새기고 있다.

〇‘중정’ 모르는 젊은이들의 숙소 ‘서울유스호스텔’


남산1호 터널 옆 서울시소방재난본부에서 더 오르면 서울유스호스텔이 보인다. 청년들의 여행 숙소로, 문화공간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이다.
서울유스호스텔을 이용하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이 자리가 옛 중앙정보부(중정)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70년대 ‘남산’은 이곳 중정을 이르는 말이었고 남영동(경찰청 대공분실)과 함께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남산’의 대표적인 정보정치는 수많은 사건을 낳았다. 대표적인 조작만 꼽아도 유럽간첩단 사건 관련 ‘최종길 서울대 교수 타살사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80여명이 구속된 ‘민청학련 사건’, ‘크리스천아카데미사건’, 미국 웨스턴일리노이대 유학생을 간첩으로 몰았던 ‘구미 유학생 사건’, ‘임수경ㆍ문규현 방북사건’ 등이다. 이들 조작사건은 모두 협박과 고문 등 수없이 많은 인권 침해를 통해 만들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부독재와 유신헌법에 항거하던 학생, 민주 인사,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고문 속에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서울유스호스텔은 당시 중정의 남산본관이었다. 현재 TBS교통방송청사와 서울시재난본부로 쓰이는 부속 건물에서도 고문이 자행됐다. 최근 대선 국면을 맞아 논란을 빚고 있는 정수장학회도 이런 공작정치를 통해 부일장학회를 빼앗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름에서 ‘정’을 육영수의 이름에서 ‘수’를 따 만든 것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 재임 시절인 2009년 서울시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의 일환으로 2015년까지 중정 관련 건물 모두를 철거키로 했다. 하지만 학계와 시민단체들은 남산의 역사 재조명을 요구, 철거 계획을 막았다.

〇 김일 박치기와 체육관 선거, 장충체육관


장충체육관은 1986년 잠실체육관이 문을 열기 전까지 국내 최대의 실내체육관이었다. 프로레슬러 김일의 박치기 라디오 중계가 남해 섬마을까지 퍼져나갔고 1972년 유신헌법에 따라 1973년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유신우정회를 만들어낸 체육관 선거의 본산이 되기도 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체육관 선거는 1980년 8월 최규하 전 대통령 사임 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단독 출마한 제11대 대통령 선거에서 총투표자 2525명 가운데 기권 1명을 제외한 전원이 찬성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장충체육관은 1963년 필리핀의 도움을 받아 건설한 국내 최초의 돔 형식 실내체육관으로 최근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 중이다.

〇 청계천 개발에도 돌아가지 못한 수표교


장충단공원에는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이전한 수표교(서울유형문화재 제18호)가 남아있다. 길이 27.5m. 너비 7.5m. 높이 4m인 이 다리는 6모로 된 큰 다리 기둥에 길게 모진 도리[桁]를 얹고 그 사이에 판석(板石)을 깔아 만든 조선시대 석교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조 때는 청계천2가 자리에 있던 수표교 동쪽에 준천사(濬川司)란 관청을 두어 수량의 변화를 한성판윤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시장 재임당시인 2003년 청계천 복원을 내세워 복개했던 도로를 뜯어냈으나 수표교는 제자리에 돌려놓지 못하고 이를 본 딴 허름한 다리를 새로 놓았다.

〇 육영재단 심볼에서 서울시교육정보연구원으로


후암동 남산공원 입구를 통해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지나면 서울특별시교육과학연구원이 나온다.이 건물은 1970년 육영재단(설립자 육영수)이 어린이들에게 꿈과 용기와 슬기를 북돋워 준다는 명목으로 세운 ‘남산 어린이회관’이었다. 당시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닌 장년층, 특히 지방에서 자란 이들에게 남산 어린이회관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특히 1시간에 한번씩 회전하는 매 위층의 새 서울 전망대는 꿈속에서나 가볼만한 곳이었다. 육영재단은 ‘어깨동무’라는 어린이 잡지를 직접 펴내며 어린이회관의 홍보에 발벗고 나서기도 했다. 당시 같은 남산 산자락의 한쪽에서는 중정이 자리 잡고 공포정치를 자행하면서 다른 한쪽에 육영수 여사를 내세워 어린이들의 꿈을 키워주겠다고 나섰던 정권을 되짚어보게 된다. 어린이회관은 1974년 국립중앙도서관에 자리를 내주고 능동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겼고 중앙도서관도 서초동으로 옮기면서 현재 남산에는 서울특별시교육과학연구원이 자리 잡게 됐다.

〇 시위대장 홍계훈 넋 기리는 장충단의 영욕


장충단공원은 일본의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참담한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5년이나 흐른 1890년 고종은 장충단을 꾸며 사전(祠殿)과 부속건물을 건립했다. 황후를 지키려다 순사한 장졸들의 영혼을 배향,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당초 시위대장 홍계훈(洪啓薰), 영관(領官) 염도희(廉道希)·이경호(李璟鎬)를 주신으로 제향하고 대관(隊官) 김홍제(金鴻濟)·이학승(李學承)·이종구(李鍾九) 등 장병들을 배향해 제사지냈다. 이후 1891년부터 을미사변 때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을 비롯, 임오군란·갑신정변 당시에 순의(殉義), 사절(死節)한 문신들도 추가해 배향했다.
하지만 일제는 1910년 8월 장충단을 폐사한 뒤 1920년대 후반부터 장충단공원으로 만들었다. 거기다 상해사변(上海事變) 당시 일본군인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이토(伊藤博文)의 보리사(菩提寺)인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했다.
아직 공원으로 남아있는 장충단에는 순종이 황태자 당시 쓴 ‘奬忠壇(장충단)’이란 비문과 민영환(閔泳煥)이 쓴 143자의 찬문(撰文)이 새겨진 비석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〇 남산 사이에 둔 빈촌과 부촌 아파트

▲ 남산맨션.
▲ 남산 시민아파트.
남산의 남서쪽과 북쪽에는 비슷한 시기에 지은 두 아파트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하나는 회현동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회현 제2시민아파트(남산시민아파트)이고 다른 하나는 장충단로 신라아파트를 지나 소월로로 접어드는 자리에 우뚝 선 한남동 남산맨션아파트다.
회현시민아파트는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직후 세운 아파트로 2006년 서울시가 중구에 아파트 정리계획을 전달한 뒤에도 아직 적지 않은 시민들이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 남아있는 시민들은 대부분 전세보증금 3000~4000만 원을 내고 입주한 세입자들이다. 이 아파트는 MBC의 예능프로 ‘무한도전’에서 서울의 서민아파트 실태를 패러디하면서 시민들에게 잘 알려지기도 했다. 남산의 반대편 산자락에 1972년 세워진 남산맨션은 그동안 전면철거설이 나오기도 했으나 아직 강북의 고급아파트로 꼽히고 있다.
남산맨션은 당초 호텔로 건축허가를 받아 현관 로비와 중앙 복도, 호실별로 차별화된 실내 구조 등이 일부 시민들의 인기를 끌면서 고급 아파트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
이 아파트 꼭대기(18층)에는 한국 사교클럽의 원조 격인 한남클럽이 39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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