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동 고개에 내리는 눈을 맞으며
사랑한다 말 차마 못하고 너와 헤어지는
만리동 고개에 눈만 내려 쌓이네.
마포 용강동에서 왕십리 행당동까지
사람들은 내리는 눈을 가슴으로 받으며
걸었던 날들이 그리워지리
내 품에 얼굴 묻고 함께 걸었던
그날들을 잊지 못하리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하염없이 내리는 희미한 가등 아래
눈발들을 잊지 못하리
차마 사랑한단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만리동 고래를 넘으며 내리는 눈을 밟아 가면
이 땅 어디선가 폭설 되어 지붕까지 쌓일
깊은 밤 소리 없이 슬퍼지는 어두운 그림자 보네.
명동이나 퇴계로에 내리는 눈도 이만 못하리
종로나 충무로에 내리는 눈도 이만 못하리
꽃 피는 봄 양수리에서 한강에 밀려와
공덕동 로터리를 지나 만리동 고개 슈퍼마켓까지 이를 때
사랑하는 이 없어도 잠깐 들러 담배 한 갑을 사고
눈 내리던 날 헤어짐을 기억하며 서 있으리
그 옛날 젊은 날의 만리동 고개에서 이틀.
■ 작품출처 : 백학기(1959~ ),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 날이 찹니다. 사람들 걸음걸이가 어지간히 빨라졌습니다. 그야말로, “걸었던 날들이 그리워”지는 추운 날씨입니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차라리 포근포근 눈 내리는 날이나 막막하게 그리워하는 게 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눈 내리던 날 이별을 한 사내가 만리동 고개를 걷고 있군요 “사랑한다 말 차마 못하고 너와 헤어지는 / 만리동 고개에 눈만 내려 쌓이”고 있군요. 헤어짐을 기억하며 걷는 사내의 걸음에는 어떤 슬픔이 묻어 있을까요? 어쩐지 저 사내의 모습이 마냥 처량하거나 측은해 보이지만은 않아 보여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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