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대학이상의 구현이 아쉽다
바람직한 대학이상의 구현이 아쉽다
  • 김진웅 선문대학교 언론광고학부 교수
  • 승인 2012.11.1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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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웅 선문대학교 언론광고학부 교수

대학가에 찬바람이 몰아친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사라질 계절적 한기(寒氣)도 아니다. 또 대학이 홀로 해결할 문제도 아니며, 어떻게 대처할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취업은 어느덧 대학에 부여된 최대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대학마다 교수별로 취업할당량이 주어지는가 하면, 학생의 취업을 위해 아예 창업을 권장한다. 대학 본연의 역할인 교육과 연구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대학은 지성인과 전인(全人)을 양성하는 큰 교육의 장이 아니라, 단순 기능인 혹은 기술자를 배출하는 ‘학원’으로 전락한 듯하다.

그런가 하면 스승과 제자의 신뢰관계도 깨지고 있다. 과거에는 전문지식 뿐 아니라 삶의 지혜까지 전수하는 끈끈한 사이였다.

하지만 인격적인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다. 교수는 제자의 먼 장래까지 염두에 두고 참된 삶을 인도하기 보다는 오로지 취업률을 높이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취업 대상 학생들은 학교로부터 걸려오는 전화가 달갑지 않다. 취업 관련 전화일게 뻔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사제관계는 어느덧 목적관계로 변모되었다.

슬픈 일이다. 몇 달 전 모 지방대학 교수의 자살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요령 없고 고지식한 지식인으로서 교수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국가는 각 대학에 취업책임을 부과하고, 대학은 이를 다시 교수들에게 전가시킨다. 이런 시스템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졸지에 무능한 교수로 인식되어 자괴심이 자꾸만 깊어진다. 

최근 교육당국은 일정 수의 대학을 강제 퇴출시킨다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출생율의 급감으로 대학에 진학할 학령인구가 줄어드는데 대한 대안이다. 퇴출기준은 취업률, 충원률   등이 핵심잣대이다.

평가를 통해 매년 공개되는 이른바 ‘부실대학’ 리스트에 오르면 사형선고를 받는 셈이다. 마치 마녀사냥의 마녀처럼 낙인찍힌다. 평가순위 하위그룹은 무조건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정책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학을 양산해 온 기조를 바꿔, 이제는 의욕적으로 대학을 퇴출시키는 현실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무색하다.

사실 대학의 수가 선진외국에 비해서 월등히 많은 것도 아니고, 문제의 핵심도 아니다. 오히려 소수 거대 대학에의 과도한 집중구조가 더 큰 문제이다. 그리고 다수의 대학이 공존하는 것은 질적 경쟁력과 다양성 제고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학령인구의 감소로 인한 문제는 슬림화 등 대학 스스로의 자구책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할 일이다. 교육당국이 해야 할 바람직한 역할은 다른 곳에 있다.

이를테면 국립대와 사립대, 수도권과 지역권의 역할 분담 및 합리적인 이원화 정책 모색, 대학 운영의 불법 부조리 감독 등이다.

대학이 취업률을 높인다고 해서 없던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존에 이미 존재하던 자리를 연결시켜 주는 것뿐이다. 일자리 확대는 궁극적으로 정부나 기업의 역할이지, 대학 고유의 업은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이 슬그머니 대학에 떠넘겨진 상황이다.

신자유주의와 강력한 국가주도 아래의 교육정책이 자유, 진리, 양심이라는 대학의 이상을 제고하는데 얼마나 기여하는지 되돌아 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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