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과거를 추억하다
영화, 과거를 추억하다
  • 김성은 동국대학교일반대학원
  • 승인 2012.11.23 14: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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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는 나보다 오래된 물건이 몇 가지가 있다. 1980년에 출간된 소설책 <등소평>과 <대원군> 그리고 얼추 30년이 되어가는 손목시계가 바로 그것들이다.

지나온 시간들만큼이나 종이는 누렇게 변해버렸고, 심지어 중간 중간 한자가 섞여서 세로로 써 있는 문장들을 읽는다는 건 여간 녹록치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책장을 한 장, 한 장씩 조심스레 넘길 때마다 파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래된 종이가 손에 감기는 맛은 묘한 긴장감까지 선사한다.

이뿐일까. “태엽을 감아줘야” 시간이 가는 이 손목시계는 아직도 내 손목에 감겨서 오래된 세월의 풍모를 도도히 뿜어주고 계신다. 그럴 때면 나는 괜시리 혼자 비죽비죽 웃는다. 덩달아 나도 오래된 물건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올해로 영화 <007>이 50주년을 맞이했다. 80년도에 나온 책들도 이렇게나 세월의 풍미를 담아내고 있는데 50주년 된 영화야 오죽하랴. 그 세월 앞에서 체면도 많이 깎이고, 흥행 보증 수표에 대한 위엄도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제임스 본드가 갖는 매력은 여전히 현재 진행 형이다.

이번에 개봉한 <스카이폴>에 대해 저마다 평가를 달리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충분히 <007>다운 영화였다. 40대 중반을 맞이한 다니엘 크레이그가 옛날의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던 군함이 퇴역하는 그림을 쓸쓸히 바라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장면은 007시리즈가 거쳐 온 지난 시절을 회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스카이 폴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시종일관 “무능력하고, 새로운 재주를 배우려드는 늙은 개는 이제 그만 박수칠 때 떠나야하지 않느냐.”고 끊임없이 자기고백과 번뇌를 거듭한다.

그러면서도 1963년 <007-골든핑거>에서 나왔던 숀 코널리의 애마 애스톤마틴 DB5를 재등장시키면서 자기의지와 대답을 명백하게 내어놓는다. “시간 속에서 그 힘은 많이 약해졌지만 임무가 주어진다면 변함없는 기백과 의지로써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이번 스카이 폴의 액션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만큼 화려하거나, 세련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007 시리즈 특유의 진한 풍미를 느끼면서 다음 시리즈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007시리즈를 보면서 자라온 홍안의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한편에 이토록 감정적으로 변하는 건, 자고 일어나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각종 디지털 기계가 쏟아지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삐삐가 스마트 폰으로 변하는 세상이 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 007의 원조 팬이었던 우리 외할아버지는 본드의 무기를 현실화할 수 있는 세상이 올 거라고는 아마 생각도 안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빠른 변화는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았다. 친구한테 쓰던 쪽지는 카카오 톡으로 변했고, 가끔씩 밤에 쓰던 편지는 메일로 변했다. 이런 변화들이 소소하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공중파 뉴스보다 SNS가 더 정확한 일기예보를 전해주고, 스마트 폰의 웬만한 사진들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능가할 정도로 실사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니 이제 전자책 판매가 증가한다는 말도 허투루 들리지는 않는다. 그 와중에 후지필름이 내년 상반기에 영화필름 생산을 중단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디지털 영화에 밀려 아날로그 필름 영화가 설자리가 더 이상은 없어진 모양이다.

이제는 영사기마저도 그때 그 시절 속의 물건으로 변해버리는 거구나. 오래된 물건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고 서글픈 경보가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 일까.

하긴 찰리 채플린 영화를 DVD로 사게 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내 책장 안에 버젓이 자리차지 하고 있는 오래된 고전 영화들은 전부 디지털 기술이 일구어낸 눈부신 활약상이 아니던가! 이쯤 되면 그렇게까지 서러워할 일도 아니지 싶다. 오히려 지금 내가 걱정해야 하는 건 30년이 다 되어가는 손목시계의 태엽을 언제든지 감아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잡생각에 빠져 골몰하는 사이에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끝나버렸다. 007시리즈가 50주년을 맞이한다는데 너무 감정 이입을 한 탓일까. 아니면 “007시리즈 50주년, 본드가 돌아온다!”는 한마디에 그 다음편이 심하게 궁금해진 탓이었을까.

어느 쪽이었든 간에 내가 <스카이 폴>을 극장에서 두 번 보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007 시리즈 DVD를 사야하나 잠시 고민했었던 것 역시도 말이다.

하지만 이제 막 시작된 겨울을 007시리즈에 내어주기엔 너무나 아까운 기분이 들었다. 일단 첫 번째로 친구들한테 크리스마스카드도 써서 보내야하고, 두 번째로 곧 다가올 12월 달에는 박경리의 <토지>를 읽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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