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에는 먼저, ‘미안합니다’하고 말하겠습니다.
올 해에는 먼저, ‘미안합니다’하고 말하겠습니다.
  • 최소영 회사원
  • 승인 2013.02.01 1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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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영 씨, 제가 오늘 중으로 책이 입고되어야 한다고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그런데 지금 3시가 지나도록 책이 안 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실겁니까?” 낯선데서 걸려온 전화, 받자마자 다짜고짜 고성이 들렸다.

그냥 살짝 핀잔을 주려는 목소리가 아니라, 책상 위 물건을 다 집어 던질 기세였다. 이런 전화, 예상도 못했던 일이라 한참을 넋이 나가 있었다.

“최소영 씨! 최소영 씨! 여보세요! 제 말 안 들리세요?” 상대방이 몇 번이나 내 이름을 외쳤을 때야 정신이 들었다. 나의 첫 마디는,“누구십니까?” 였다.

사연은 이러하다. 나는 작은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인쇄소에서 책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배송지가 잘못 기재된 것이다. 거래처에서 쓰는 책 창고 두 개 중에 한 군데로 책을 먼저 보내달라고 해서, 내 나름대로는 인쇄소에 빠듯한 일정에 겨우 겨우 시간을 맞춰 배송을 끝낸 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창고가 아니라, 이쪽 창고로 갈 할 책이었단다. 책이 들어오지 않아 고객에게 당일배송 약속을 지키지 못해 화가 난 담당자의 전화였다.

“아니, 아침에 보내드리지 않았습니까? 입고되었다는 확인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씀이신가요?” “일산창고가 아니라 여기, 서울로 보내셔야죠!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리고 그렇게 부탁드렸는데, 이 결과가 뭡니까?” 상대방은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서울이요? 저는 그런 이야기 처음 듣습니다. 저에게 언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내가 한 이 말이 아직까지도 가슴에 남아 부끄럽다. 왜냐하면 내 첫마디가 “미안합니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서울창고’이야기는 처음 들었고, 거래처 직원도 서울창고에 대해 이야기 해 주지 않았음이 나중에 드러났지만, 그래도 나는 마음이 쓰렸다.

미안합니다. 상대방이 화를 낼 때에는 이유야 어찌되었든 미안하다고 말을 시작했어야 했다. 고성에 얼이 빠져 있던 나는 오히려 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질세라 같이 소리를 질러가며 말이다.

사실 통화하는 내내 미안하다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매너 없는 행동한 상대방을 나무라고 싶은 마음에, 미안하다는 말이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오기를 부린 것이다.

“미안합니다. 몰랐습니다.” 해야 할 것도 그저 뻣뻣하게 “몰랐습니다.”라 답하며 속으로 안절부절하던 내 모습이 여전히 부끄럽다.

그 날 저녁에 나는 내일 아침 담당직원에게 먼저 사과하기로 다짐을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책상 앞에 앉으니 어제의 고성이 떠올라, 신경질이 났고 사과하는 것을 미루고 말았다. 그리고 더 이상의 통화나 대화도 없이 거래처 다른 직원과 일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얼마 뒤 계산서를 발행하고 책 대금을 받아야 할 때 그 직원에게 처리를 부탁해야 했다. 사과도 없이 한참을 지난 후라 마음이 불편했다.

이메일에 계산서를 보내니 처리해달라는 용건보다, 미안하다는 말이 당연히 먼저 나왔다. “일전의 일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지금에야 사과드리게 된 것도 미안합니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 한 번 찾아뵙고 인사드리겠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물론 상대방도 그 때의 실수를 너그럽게 이해해달라고 답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내가 ‘미안하다’는 말에 얼마나 인색한지 알게 되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고, 일이 틀어진 것은 너 때문이고,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고 등등 내가 미안하지 않은 이유를 먼저 떠올리고, 핑계 댈 생각을 먼저 하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미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네 탓’ 이고, 그 일이 더 틀어지지 않고 이 정도에서 잘 마무리된 것은 ‘내 덕분’ 이라는 소심한 자기 위로를 하느라 그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올 해에는 먼저, ‘미안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연습하는 중이다. 쉽지 않다. 일단, 정말 진심을 담아야하고, 상대방보다 먼저 말해야하고, 게다가 그렇게 말한 뒤에는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의 잘못된 부분을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말이 뭐가 어려워?’ 하고 가볍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 말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다.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한 진짜 반성을 시작하게 하는 말. 상대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나를 낮추면서 상대방 마음을 열게 하는 말.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잠깐, 생각할 여유를 주는 말. 미안합니다.
다음 달 쯤, 아까 말 한 그 직원을 만날 기회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직접 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내 고마워 할 것이다. “덕분에 제가 ‘미안합니다.’ 를 용기내서 먼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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