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기린을 상상하다.
도서관에서 기린을 상상하다.
  • 김성은 동국대학교일반대학원
  • 승인 2013.02.07 18: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참 한가로운 휴일 오후였다. 특히나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아무렇게나 무너뜨리고 주저앉아 마음에 드는 책 한권을 골라내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더더욱. 다리가 슬슬 저려온다고 생각이 들 때 즈음, 내 손에는 판타지 소설 한권과 상상 속 동물에 관한 책이 들려있었다.

해리포터 이후로 판타지 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판타지 소설이라니, 스스로도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뭐, 계사년 2월. 애초에 기묘한 계절이니 어쩔 수 없는 탓이려나. 이내 몇 번의 고개 짓으로 쓸떼 없는 감상은 털어내 버리기로 했다.

미처 31일 채우지 못한 칠삭둥이 계절, 2월은 언제나 기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모든 과정을 무사히 마쳤음을 의미하는 졸업시즌과 새로운 해의 시작을 의미하는 설날이 동시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졸업시즌 근처에 머물러있는 발렌타인 데이는 잠시나마 기분을 어딘가 멜랑콜리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2월은 그렇게 한없이 달콤하고, 나른한 계절이면서 곧 다가올 3월을 준비하기엔 턱 없이 부족한 달이다.

특히나 올 해가 계사년이라는 점이 더 그랬다. 무슨 용 미니어처도 아니고…. 어째서 용이었을까 싶은 생각과 함께 머릿속에서 상상의 동물 몇 가지가 환상처럼 나타났다가 곧 사라졌다.

손 안에 감아쥔 책을 펼쳐들고는 차례를 눈으로 훑었다. 몇 가지나 알고 있을까. 의외로 익숙하면서 낯선 동물의 이름이 눈을 사로잡았다. 바로 기린이었다.

기린은 용, 봉황, 거북이를 포함한 4대 신수(神獸) 중 하나로 생김새는 지금의 기린이 아니라 사슴과 용이 섞인 모양새를 하고 있다. 본래 기린은 상냥하고, 자비로운 성격을 갖고 있어서 다른 동물을 해치지 않으며, 풀 한포기 조차도 절대 상하게 하는 법이 없다.

또한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안위를 보살피는 동물로서 성군 혹은 성인이 나타날 조짐을 먼저 알아보고 그 등장을 알려주며 성인이 죽음을 맞이할 때가 되면 먼저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

보통 왕을 상징하는 용, 봉황, 주작과 같은 신수들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국가와 백성을 굽어 살피는 권력의 주체들이지만 기린은 항상 신료의 자리에 머물고 있다. 결단코 왕좌를 넘보지도, 왕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국가와 백성의 안위에 사력을 건다. 티끌한 점의 욕심도 없이.

며칠 전 엄마와 카센터에 갔다가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우리 자동차를 수리하던 아저씨는 흘러나오는 뉴스에 혼잣말을 하듯 새 대통령이 인선을 잘 뽑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갈수록 살기가 힘들어지는 세상 속에서 조금이나마 숨을 트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백성의 아픈 상처를 견뎌낼 수 없는 기린의 상냥함이 아닐까.

영원히 날아들지 않을 학을 기다리는 학마을 사람들처럼 순순히 상상의 동물을 믿을 정도로 어린아이는 아니다. 정말 기린처럼 상냥하고, 자비로운 정치가가 언젠가 나타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점점 한숨이 쌓이는 것에 익숙해질 정도로 어른도 아니다. 그저 지금 눈앞에 처한 상황이 먹먹해서 저 하나 돌보기도 빠듯한 무수한 이십대들 중 한 명일뿐이다.

서점에도, 도서관에도 무수히 많은 책들은 젊은 청춘을 위로한다. 빛나는 청춘을 살아내고 나면 여유로운 노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믿지 않는다. 젊어 고생은 늙어 막대한 병원비로 돌아오고, 티끌은 모아도 영원히 티끌이며, 개천에서 발견 할 수 있는 건 용이 아니라 지렁이 밖에 없다고 그저 냉소할 뿐이다.

그럼에도 유달리 새 해의 새로운 시작과 상상의 동물이 보여주는 상냥하고 자비로운 정치에 집착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건 냉소를 머금은 얼굴 뒤로 감춰진 상처가 아프기 때문이다.

잠시나마 상상의 동물이 있는 판타지 속 세상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감상이 분명 오랜만의 판타지 소설을 손에 쥐게 했을 테다. 상상의 동물을 꿈꾸고 기원했던 과거에도,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바라는 관료의 이상향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언젠가 추운 겨울날 광화문에서 아빠의 품에 안긴 아이가 “아빠! 저 산 너머에 대통령이 있어?” 라고 물었다. 그런데 아빠의 대답은 “여기서는 보이지 않아” 였다. 그때는 그렇지 안보이지 하고 웃었다.
하지만 정말 보이지 않았던 것뿐일까. 대통령도 우리가 보이지 않고, 우리도 대통령이 보이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기린을 기다리는 학마을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