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근원적 소통의 시간이다
명절은 근원적 소통의 시간이다
  • 김진웅 선문대학교 언론광고학부 교수
  • 승인 2013.02.15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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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웅 선문대학교 언론광고학부 교수

매년 되풀이되는 설 명절이 지나갔다. 세태가 많이 달라져 귀향보다는 연휴를 여행으로 즐기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국민 다수는 여전히 명절의례에 따라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가족들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즐거운 시간을 갖으려면 치루어야 할 과정이 지난하다. 특히 명절기간의 대부분을 귀향길 이동시간에 헌납하곤 한다.

국토를 가로질러 서울-부산을 달리는 KTX는 불과 두 시간 남짓 걸리고, 네비게이션은 목적지까지 친절하게 안내하지만, 동시에 쏟아져 나온 사람과 차로 넘치는 명절 때는 이러한 첨단기술이나 요령이 무용지물이 되곤 한다.

오가는 고향길의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가족 간 직접 정을 나누려는 만남의 욕망은 식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 욕구가 더욱 커지는지도 모른다.

속도 속에 메몰된 일상의 삶, 파편화된 가족 구성원들의 삶, 차가운 회색빛 도시의 단절되고 불연속적인 일상은 자연스럽게 반대의 극단을 갈망케 한다. 즉 느림, 재회소통, 연속성, 고향에의 욕구이다.

장관을 이루는 귀성대열은 마치 연어가 먼 바다를 헤치고 탄생의 근원인 강으로 회귀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이성적, 합리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논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연례행사이다. 본원적, 무의식적 행위라고 할까?

우리의 일상은 속도가 지배한다. 유행의 빠른 변화 뿐 아니라, 늘 뛰어다니는 발걸음은 이제 자연이 되었다.

또 새로운 기술문명의 이기들은 속도를 상징하는 수식어가 점점 추가되곤 한다. 고속, 초고속을 넘어 광속으로 이어지는 속도전의 끝은 어디일까?

더구나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이러한 속도의 빠름에 적응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마치 우리를 둘러싼 기계문명의 부속품처럼 기능하기 위해 점점 더 빨리 뛰어야만 한다.

여기에 적응 못하는 노약자나 방관자는 종종 ‘로드킬’을 당하는 불행이 이어지지만, 초고속 사회 속에 메몰된 우리는 이런 현상에 무감각해진지 오래다.

설, 추석 같은 명절은 이런 정신없는 가속적 삶에 대한 강제 휴식 내지는 조절의 기능을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일손으로부터의 해방, 느림의 시간이 모두에게 동시에 주어진다.

비록 그 시간이 도로 위의 공간으로 소진될지언정. 이 시간은 나, 그리고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명상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걷는 속도로 밖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귀성차량에서의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밖의 사물을 바라보고 느끼게 만든다. 또 안으로는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늘 외부의 원심력에 지배당하는 듯 삶에 쫓기던 일상을 천천히 관조하면 궁극에는 자아라고 하는 내면의 구심력에 도달하게 된다. 자아의 주체적 감각을 되찾는 것이다.

나아가 나의 연장으로서 가족 간의 정을 가슴으로 재충전하게 된다. 이는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차가운 머리와 육체의 고역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삶을 지탱케 하는 원동력이 된다. 비록 몸은 고생스럽더라도 마음은 힐링의 계기가 되는 것이 명절이 아닐까 한다.

모든 생명은 알 수 없는 근원에의 영원회귀를 갈망한다. 명절은 이러한 망각의 고향을 재확인하는 연례적인 의식이다. 또 이를 통해서 대칭성의 삶 또는 조화로운 삶을 향한 밑거름을 얻게 된다.

명절은 자아를 재발견하는 시간이자, 가슴으로 느끼는 혈연적 오프라인 소통관계를 지속케 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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