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은 없고 껍데기만 기록하는 생활기록부
‘생활’은 없고 껍데기만 기록하는 생활기록부
  • 권종현 우신중학교 교사
  • 승인 2013.02.2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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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종현 우신중학교 교사

학생들의 2월은 종업식과 졸업식으로 분주하다. 지난 1년 동안 어울렸던 친구들, 가르치신 선생님과 헤어짐을 준비한다.

그렇다면 2월의 학교와 교사들은 무엇으로 가장 분주할까? 대부분의 교사들은 생활기록부를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정작 아이들은 뒷전에 두고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상의 생활기록부에 몰두하는 교사들만을 탓할 수도 없다. 학교는 입력 형식에 맞춰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데 가장 많은 행정력을 쏟으며 교사들을 다그친다.

학년 말이면 생활기록부 입력 지침을 알리는 메지지가 하루에도 예닐곱씩이나 쏟아진다. 그러나 교사의 에너지를 잡아먹는 생활기록부 속에는 정작 아이들의 살아있는 생활이 자리잡을 공간이 없다.

교사들이 온 힘을 다해 생활기록부에 입력하는 것은 박제된 아이들의 창백한 껍데기들이다. 심지어는 거짓말투성이다.

‘확인서’ 위한 봉사활동

봉사활동을 기록할 때, 아이가 봉사활동으로 소중한 경험을 했겠구나, 싶은 것은 열에 하나도 안 된다. 대부분이 시간 수를 채우기 위한 것과 엄마의 노력이 엿보이는 것들이다.

확인서가 남발되다 보니 공신력 있는 기관을 국가가 지정하는 코미디도 연출한다. 수만 개의 기관 중 어느 것이 기준에 맞는 기관인가 감별을 한다.

그것도 못 믿으니 사전봉사활동계획서로 허락을 받은 봉사만 인정하란다. 현실에 맞지 않으니 수백 개의 봉사활동 확인서에다 사후에 사전계획서를 만들어 붙이느라 난리다. 그것으로도 봉사 기준 시간을 못 채우니, 학교는 애초부터 모든 학생들에게 10시간 이상의 서류상의 봉사활동을 계획해 입력해준다.

알 수 없는 학생의 독서활동을 기록

“‘청소년을 위한 정치 이야기(도리스 슈뢰더)’를 읽고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중심축인 자유와 평등의 의미가 근대 시민혁명 이후 역사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폭넓게 이해함.” 생기부 기재요령 지침에 나온 독서활동 기록 예시문이다.

아이들이 읽었다며 기록해 달라는 몇 줄의 글은 중구난방이어서 그대로 기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독서활동 기록은 교사들의 작문 실습장이다. 더구나 아이들이 정말로 책을 읽었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

실제로 읽었으나 주제 파악은 물론 내용조차 기억 못하는 아이들도 많다. 읽지 않았으나 ‘엄마의 땀방울’이 박힌 인터넷 짜깁기도 많다. 교사는 형식에 맞는 기록 요청을 멋진 작문 실력을 과시하며 모두 기록할 수밖에 없다.

생활 기록, 출결과 성적만으로 충분

창의적 체험활동이라며 입력하는 수많은 내용들 중에서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뭐가 있을까? 학급자치 시간마다 무슨 주제로 활동을 했는지, 재량 과목 매시간에 무슨 내용을 공부했는지, 동아리 활동 시간마다 무슨 활동을 했는지 등.

특히 결석 상황을 체크하여 개인마다 몇 시간을 활동했는지 계산을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전체적인 출결상황 기록 외에 자율활동을 76시간을 했는지 77시간을 했는지, 동아리 활동을 34시간을 했는지 35시간을 했는지를 왜 따지며 ‘맞다’, ‘틀리다’ 직원회의에서 실랑이를 벌여야할까.

어떤 질병으로 결석을 했는지 왜 기록을 해야 할까. 왜 기록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NEIS에 기록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란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배움과 성장의 경험을 갖는다. 자신의 사귐과 배움과 깨우침의 경험은 충분히 기록할 가치가 있다. 그것은 개인의 기록으로 남겨야 할 몫이다. 교육은 그러한 경험을 만들어주고 그 가치를 터득해 스스로 기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처럼 학생들의 살아있는 경험과는 무관한 것들을 교사가 천편일률적으로 ‘날조’해 기록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상급 학교의 객관적 입학사정 자료로서의 가치도 상실했다. 주관적 영역을 객관화 시키겠다는 처음의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학교 생활의 객관적 자료는 성적과 출결만으로 충분하다. 주관적 영역에 대한 입학사정 자료는 상급 학교가 심층 면접 등을 통해 객관화시켜야 한다. 지금의 생활기록부는 학교의 행정력과 교사의 에너지를 낭비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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