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공책이다
책은 공책이다
  • 김진웅 선문대학교 언론광고학부 교수
  • 승인 2013.02.28 18: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진웅 선문대학교 언론광고학부 교수

나는 사색노트로서 책을 쓰고 싶다. 완성된 책이 아닌 미완성 책이다. 나의 미완성은 독자를 통해서 완성될 수 있다. 내가 빈틈없이 완벽하게 공간을 채우면, 독자는 나와 함께 할 여지가 없게 된다. 따라서 나와 독자가 공감하려면 빈틈이 주어져야 한다. 마치 부모와 자식이, 또 스승과 제자가 공감하려면 깊고 넓은 신뢰와 사랑이 필요하듯이.   

기존의 책은 모두 완성된 제품이다. 기성품처럼 똑같은 공정을 거쳐 생산된 책이다. 그곳에서 독자는 글자그대로 읽는 자의 역할만 기대된다. 눈으로 그리고 입으로 읽는 자의 위상만 허용되는 것이다. 그 이상을 원하는 독자에게 가능한 것은 밑줄을 긋는 행위 뿐이다.

또는 빈 여백에 메모하는 것이다. 책 지면의 위, 아래. 왼쪽, 오른쪽 여백은 마치 만원버스처럼 독자에게 운신할 폭이 매우 비좁다. 애초부터 작자는 독자를 동반자로 간주하지 않기에, 독자의 공감표출은 협소할 수밖에 없다. 이런 책은 일방적 소통인 것이다.

따라서 사유하는 독자는 그 책이 아닌 또 다른 공간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작자의 책과 독자의 노트는 단절된 소통에 그치게 된다. 따로따로의 독백일 뿐이다. 소통의 단절이다. 그냥 책일 뿐이다.

그러나 ‘노트책’은 다르다. 나의 노트는 독자의 노트와 합쳐질 때 비로소 책으로 완성된다. 그러려면 필자는 여백을, 틈을, 공간을 함께 써내려가야 한다. 빈 공간은 공유지이다. 필자는 단지 마음으로만 그곳을 채워야 한다. 그래야 독자가 함께 들어올 수 있다.

필자와 독자는 동반자가 된다. 쌍방적 소통관계가 형성된다. 나아가 독자는 필자로 거듭날 수 있다. 자식이 성장하여 부모가 되듯이, 제자가 성장하여 스승이 되듯이…. 가끔 저명한 사상가의 유고집을 접할 때가 있다. 이는 작자가 생전에 완성하여 출간한 책과는 다르다.

특히 노트형식으로 자신의 생각, 사유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미완성이다. 완성된 책만 접하던 독자에게는 낯선 느낌마저 준다. ‘친절한 금자씨’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상대이다. 그래서 종종 후학이나 가족이 이를 책으로 ‘완성’하여 내놓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독자가 이를 완성할 수도 있다. 그러면 작자와 독자는 긴밀한 소통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물론 독자가 능동적으로 빈 공간을 채우는 행위가 쉬운 것은 아니다. 절반을 독자가 완성해야 비로소 책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다는 행위의 완성은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 자식이 부모를, 제자가 스승을 뛰어 넘듯이.

그래서 나는 미완성된 책을 쓰려고 한다. 공책이다. 독자와 함께 완성하는 책이다. 디지털시대는 필자와 독자의 구분이 사라진다. 소통과 공감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이를 거스르는 자는 독재자이다. 

수많은 사유의 흔적이 배어있는 레오나르드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노트책,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의 유고 노트를 들여다보면서 나도 ‘노트책’의 필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앞선다. 먼 훗날 이름 모를 독자가 내 노트, 수첩을 하나의 책으로 완성시키기를 기대하면서. 일종의 공감적 소통방식이다. 위정자와 국민 사이를 잇는 정치도 마찬가지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