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바케와 개취
케바케와 개취
  • 김원진 대학생
  • 승인 2013.03.0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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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식겁했다.
네가 나에게 가부장의 표본이라 잔소리 해댔으니, 이번 기회에 여성학 수업을 들으며 자기반성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친구 왈. “야. 그래도 그건 아니지. 여성학 그거 페미니즘 아니야? 이상한 거잖아.”

여성학은 이따금씩 오해로 들끓는다.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선 페미니즘 혹은 여성학이라고 하면 일단 불편하다고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이 많다. 왠지 낯설고 고집스러운 것. 동시에 남성을 누르고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학문 정도로 인식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로 불편해 한다. 하나의 학문분과로도 확고히 자리매김하지도 못했다.

덕분에(?) 여성학 수업은 대체로 소규모이고 토론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편이며 게다가 절대평가이기까지 하다. 글도 많이 쓴다. 나는 신난다. 어쨌든 난 지난 학기 두 개의 여성학 수업을 들었다. 매 시간 토론(때로는 격론)하고 자주 글을 썼다. 꽁꽁 싸맸던 생각을 뱉어냈다.

다만 소수인원이 참여한 수업의 이점인 절대평가를 노리고 들어온 학생들이 제법 많았기 때문인지 대화는 그리 매끄럽지 않았다. 논의가 쳇바퀴 돌듯 제자리에 맴돌았던 적도 많았다. 아마 많은 학생들이(나를 포함) 깊은 고민 없이 수업에 참여했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러운 추측도 해 본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항상 논의의 끝은 묘한 줄임말로 끝난 경우가 많았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답이 안 나오면 썼던 모두의 암묵적 동의어였던 것 같다. 바로 ‘케바케’와 ‘개취’다(처음엔 당황했다. 12학번 친구들은 ‘프사’(프로필 사진)과 같은 생소한 줄임말을 남발했다).

‘케바케’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의 줄임말로 각 사안마다 혹은 사람마다 성격, 특징 등이 다르니까 일반화하기는 어렵다는 뜻으로 주로 사용된다. ‘개취’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의 취향을 압축한 말이다. 개인의 취향이니까 존중해주자 정도의 의미다.

단편적으로 보면 그럴 듯하다. 성급한 일반화를 경계하는 올바른 태도라고나 할까. 아니면 개인과 개인의 소수 취향을 존중하는 20대의 모습을 드러내는 징후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난 ‘개취’와 ‘케바케’로 마무리되는 논의가 나름 만족스러웠다. 깊이는 부족해도 서로를 존중하는 대학생!

해가 바뀌고 또 다른 학기가 시작될 즈음, 그러니까 바로 지금, 생각에 조금씩 균열이 왔다. ‘케바케’와 ‘개취’로 논의가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지 수업 시간이 75분에 불과했기 때문일까. 수업에 참여했던 구성원들은 진짜 개인을 배려하는 민주시민의 덕목을 갖췄던 걸까. 아니면 성급한 일반화를 경계하는 지성이었던 걸까. 자꾸 ‘케바케’와 ‘개취’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면서,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결론을 수정했다. 나도 그랬고 모두가 그저 개인의 문제로, 성격의 특징으로 치부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가부장적 문화 때문이 아니라 그 남자의 성격이 그랬고, 그 여자는 원래 소심했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대다수가 동의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다르니까 갈등이 발생하는 거라고 우리는 얼버무렸다.

한 사회를 관통하는 낡은 관습, 진부한 이데올로기를 무시하고 회피한 것이다. 사회와 문화가 은밀하게 담고 있는, 그래서 쥐도 새도 모르게 개인을 잠식하는 ‘가부장제’와 같은 모순을 나는 외면했던 셈이다. 어쩌면 소위 말하는 신자유주의 논리의 쌍생아일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가 개인에게 성공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강요하고 은연중에 실패의 책임을 온전히 개인에 돌린다면, 위의 논리는 개인을 배려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모순을 은폐해 덫에서 빠져나오기 힘들게 만든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를 비롯한 수업에 참여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논리를 수용하고 있었다.

여성학은 여전히, 심지어 같은 여성들도 불편해하곤 한다. 이유는 다양하다. 여성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사회 각 분야에서 작은 민주화가 일어날수록 여성학과 여성의 권리에 관한 불편함은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난다. 

어쩌면 우리는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불편함을 잊기 위한 수단으로 ‘개인’을 존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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