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편지를 청년의 어머님과 아버님들께 드립니다. 언젠가 그 입장이 될 예비 부모님들께 드립니다.
감히 건방진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미이기에 아프고 앓았던 그간의 생각을 나누며, 늦게나마 깨우친 바를 용기로 문 여는 편지입니다.
아홉 달을 몸에서 키우며 자식을 볼 때에 거는 기대는 무척 큽니다. 내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보이고, 내 자식이 똑똑하고 씩씩해 보이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집마다 자식 이야기로 들어가 보면, 애간장이 썩어보지 않은 집은 없습니다. 시기와 내용이 다를 뿐이지 모두 그렇습니다. ‘내 자식은 그렇지 않아’라고 한다면 무관심하거나 위선입니다. 불완전하기에 당연하며,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동일합니다.
우월한 유전자의 돋보이는 부모 사이에서도 선천적으로 장애나 이상을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고 사고나 질병으로 상시적인 고뇌의 존재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자라날수록 ‘여기서 이만하면 됐다’는 없고 다음 발달 단계로 이행될 때마다 더 높은 벽에 부딪힙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옥죄는 자녀문제는 학업의 성취도와 사회성입니다. 어리석은 서열 충성심이 아니라,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지성의 양분을 주고, 냉정한 의사결정을 하면서도 인정미와 의리 있는 독립된 존재로 성장하기를 바라지만, 특히 질풍노도의 시기에는 대책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안내와 지도와 교정이 필요한 경우가 생기지요.
우리의 애정과 안타까움은 성급하게 비난과 원망으로 충돌합니다. 들어보고 알아줄 생각은 않고 무리하게 요구하며 우리 기준을 들이대어 도달하지 못하면 실망하거나 포기합니다.
제가 깨우친 것이 있다면, 한 번에 혹은 짧은 시간 동안에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향상과 진전은 답답하리만큼 천천히 일어나서 자칫 티가 나지도 않습니다. 개선이 필요하여 그런 시도를 하는 자녀들에게 결과만 가지고 질책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그 내용과 근거가 무엇이건 가장 나쁜 개입인 것 같습니다.
아이들도 잘되고 싶은 마음일 겁니다. 공부도 잘하고 재능도 뛰어나고 모두에게 인기가 있어서 칭송받고, 좋은데 취직해서 자랑스럽고 싶을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을 놓치고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우리 자식들, 그 아이들 마음은 우리가 우리를 문 닫는 바람에 제각각 싸늘하게 더 거칠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과 연관하여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 강한 여인도 자식 때문에는 웁니다. 우리가 자식에게 바치는 마음은 이상하게도 조건이 없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바치게 됩니다. 이런 마음이 충만해지면 저절로 남의 자식도 귀하고 사랑스러워집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유능하고 독립적이며 책임감 있고 강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지해줄 것은 천천히 가고 답답하게 변화하더라고 참아주고 들어주고 기다려주고, 여전히 온유하게 인내하는 일이라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