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점령하라’는 99%의 반란
‘정치를 점령하라’는 99%의 반란
  • 이정임 한의사
  • 승인 2013.04.18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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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의 시선

안동으로 가는 고속도로 어느 휴게소에서 한 젊은 여성이 갑자기 실종된다. 약혼녀의 실종에 초조해진 남자는 그녀의 행방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리고 드러나기 시작하는 과거. 그녀는 한 여성을 살해하고 그 사람 이름으로 살아오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작년 봄 상영했었던 영화 '화차'의 줄거리다. 이 영화는 살인과 실종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범죄영화는 아니다. '왜 여주인공이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는가'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빚 때문에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사창가를 전전한다.

그녀는 아기마저 잃은 뒤 자신을 추적하는 사채업자 조직을 피해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려 했던 것이다. 살인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영화의 인기는 주인공의 처지에 공감하는 관객이 많다는 방증이 아닐까?

영화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빚에 시달리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 혹은 특권층으로 부르는 상위 1%를 제외한 99%의 국민들은 대부분 빚을 내 생활하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다시 새로운 빚을 얻는다.

‘가계부채 900조원 시대’에 20대는 학자금 대출로 고통 받고 30대는 ‘허니문 푸어’(Honeymoon poor)가 되어 결혼생활 시작부터 빚에 허덕인다. ‘신용불량자’ 란 낙인은 어느 순간 남의 이름이 아니다. 왜 우리사회에 신용 불량이 이토록 만연하게 되었을까?

20대는 지나치게 비싼 등록금, ‘허니문 푸어’는 치솟는 전세값이 고난의 시작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점에서 ‘신용’에 대한 우리 머릿속 개념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서 ‘신용이 없다’고 하면 주로 ‘그 사람을 믿을 수 없다’거나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신용은 도덕률이 아니라 경제적 개념, 곧 돈 문제로 좁혀 생각해도 된다. ‘신용’을 창출하는 은행은 중세 북 이탈리아 자치도시에서 시작되었다. 난세에 자신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은행이 발달했는데 그것은 정치력이 부족했던 결과이기도 했다.

강력한 정치가 지배했던 동양에서는 상업을 천시했고, 경제적으로 성공하더라도 정치적 신분을 격상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자연스레 동양의 은행은 투자로 돈을 불리는 곳이 아니라 정부가 운영하는 기관쯤으로 인식돼왔다. 대출 또한 담보가치가 확실한 부동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부동산뿐 아니라 금융을 장악한 재벌들은 ‘신용’과 상관없이 거액의 돈을 빌릴 수 있었다. IMF 외환위기도 그 연장선상에서 발생했다. 그런데도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기업부채는 상당부분 가계부채로 전환됐다.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세금으로 공적자금을 마련해 기업을 도와준 결과 기업부채는 줄었지만 가계부채는 늘어났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법인세도 대폭 깎아주었다. 반면 정부의 사회복지 지출은 선진국 중 꼴찌 수준이어서 서민들의 부채규모는 급증할 수밖에 없었다.

가계부채 문제 해결책은 개인 신용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정책의 문제로 접근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신용불량에서 탈출하기 위한 개인의 자구책도 필요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빚이 빚을 늘리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미국에서도 상위 1%에 대한 99%의 반란이 시도됐다. ‘월가를 점령하라’는 시위가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99%의 자각과 행동이 필요한 때다. 다만 우리나라의 99%가 점령해야 하는 것은 금융이 아니라 예산정책을 관장하는 정치다.

99%의 국민이 자신들을 대변하는 정치를 만들어 나갈 때 ‘가계부채 900조원 시대’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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