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고개, 어린 시절의 단상
미아리고개, 어린 시절의 단상
  • 허영섭(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보도교양특별위원)
  • 승인 2013.08.05 1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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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고개는 황톳길이었지요. 아스팔트의 흔적은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자동차는 다녔냐구요? 글쎄요, 서울에서 의정부로 통하는 유일한 통행로였던 만큼 왜 자동차가 다니지 않았겠습니까만 어린 기억에 그 고갯길에서 자동차를 목격했던 장면은 거의 떠오르지 않습니다. 서너 살 때의 어슴푸레한 기억이니, 벌써 50년도 훨씬 지난 시절의 얘깁니다.

그 어느 여름철인가, 아직 서른 줄이던 어머니께서 고갯마루에서 냉차 장사를 하셨던 것입니다. 냉차라야 얼음물에 기껏 사카린 같은 합성 감미료나 미숫가루를 탄 것이었겠지만 고개 넘어 오가는 길손들이 목을 축이기에 그나마 더 훌륭한 마실거리도 없었을 때입니다. 그때 어머니에게 손목 잡혀 따라간 어린 아들이 한나절 동안 혼자서 뛰어놀던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불과 몇 해 전 그 일대에서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과 국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인민군이 후퇴할 때는 남한의 지도층 인사들이 그 고개를 지나 자꾸 뒤돌아보면서 줄줄이 북녘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어린 아들은 알 턱이 없었습니다. 반야월 선생의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그 직전에 발표되어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본인이 전쟁의 폐허 속에 태어났던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때 미아리고개 너머 산비탈에는 움막 거주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땅바닥을 파내고 그 위에 지푸라기를 덮어 비바람을 겨우 피할 수 있도록 만든 생존의 임시 거처였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돼지우리보다 나을 게 없었으니, 어디 먹을 것이라고 변변했을까요. 우리 식구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였기에 집을 잃고 당장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몰려든 탓에 저절로 움막촌이 형성됐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일종의 난민 캠프였던 셈입니다.

그 난민들을 위해 미군의 주기적인 구호물자 공급이 있었고, 소방차가 출동해 식수를 공급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움막촌 주민들이 배급을 받으려고 길게 줄지어 서야 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특히 식수를 공급받을 때는 식구들마다 세숫대야나 양푼 같은 것을 하나씩 챙겨들고 총출동해야 했지요. 미아리고개를 떠올릴 때마다 비록 잠깐이나마 코흘리개 시절의 움막생활과 젊었던 시절의 어머니 모습이 겹쳐지는 이유입니다.

그 뒤로도 자라난 터전은 미아리고개 바깥이었습니다. 움막집에서 벗어났어도 그 일대의 생활환경을 한꺼번에 탈출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의정부로 통하는 국도가 아직 왕복 2차선에 불과할 때였습니다. 도로 양옆으로는 논과 밭뿐이었고, 그 옆의 산에는 공동묘지를 파헤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미아리고개도 좀 더 흙을 파내고 높이를 낮추는 작업 끝에 아스팔트 포장이 이뤄졌던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미아리고개를 넘어 시내 쪽 거리를 처음 구경한 것은 유치원에 다니면서 창경원 소풍에 나섰던 때입니다. 그때 표현으로 ‘문안’ 구역에 들어섰던 것이지요. 아마 혜화동 경계에 동소문이 위치하고 있기에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만, 미아리고개 바로 밑에까지 전차가 다니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문안’과 ‘문밖’은 생활환경이 확연히 구분되던 터였습니다. 미아리고개 바깥의 ‘문밖’은 행정구역상으로만 서울이었지 시골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 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만,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때 움막촌의 기억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당시 그 동네를 더듬으며 유년의 흔적을 느껴보려고 시도했던 것이 그런 때문이겠지요. 그 일대에 건물과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해도 그때의 기억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느덧 6·25 전쟁이 휴전협정으로 종결된 지 60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전란의 잿더미에서도 우리 사회는 많은 발전을 이룩했고, 세월이 흘러간 만큼 전쟁의 상처도 아물었습니다. 오히려 전쟁에 대한 우려와 심각성이 상당히 퇴색한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입니다. 현재 미아리고개 일대에 사는 주민들 가운데서도 당시 움막촌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장병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는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철부지였기에 미아리고개의 슬픈 사연은 미처 몰랐을망정 아직도 움막집 생활은 불현듯 스쳐 지나가곤 합니다. 적어도 우리 자식들이 다시 그런 비극적인 처지에 놓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봄이 오면 개나리꽃으로 노랗게 물들고 여름이면 그 초록의 잎으로 뒤덮이는 고갯마루가 피와 눈물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미아리고개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 평화와 희망의 상징으로 바꾼다는 소식에 언뜻 스쳐가는 어린 시절의 단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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